1979년 5월 어느 날 밤, 미국 뉴올리언스의 한 주택가. 두 아이의 엄마였던 에바 게일 패터슨이 성폭행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된다. 유일한 목격자는 네 살배기 아들 루크. 증언은 한 마디뿐이다. "나쁜 남자가 들어와서 엄마를 죽였어요." 며칠 후, 맥주를 훔친 죄로 교화시설에 다녀온 게일의 이웃 래리 러핀(당시 19), 러핀과 시설에서 함께 생활하던 필립 비븐스(28)·레이 딕슨(22)이 용의자로 체포된다. 러핀은 범행을 자백하고 세 명의 젊은이는 1980년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러핀은 후일 "경찰의 협박으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자신의 말을 뒤집었지만, 사법당국은 이를 묵살했다.

◆무죄 선고받은 그는 이미 감옥에서 사망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달 16일. 미시시피주 해티스버그 법원은 '비븐스와 딕슨은 무죄'라고 선고했다. 어느새 50대가 된 두 사람은 자유의 몸이 됐다. 러핀은 8년 전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들의 무죄를 밝힌 건 증거물로 보관된 성폭행 검사 도구에 묻어 있던 범인의 정액이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 범행 현장과 가까이 살던 또 다른 남성이 진범으로 밝혀진 것이다. 비븐스와 딕슨은 미국 뉴욕에 있는 비영리기구 '결백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의 도움을 받았다. 딕슨은 무죄가 선고된 후 "30년 전 경찰은 범행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형이 선고될 수도 있다고 윽박질렀다"며 "수십년 동안, 당시의 (자백하기로 한) 선택에 대해 무수히 후회했다"고 말했다.

감옥에서 18년간 복역한 뒤 지난해 11월 무죄가 입증돼 풀려난 페르난도 베르무데스가 판결이 나온 직후 맨해튼에 있는 뉴욕주 법원에서 변호사와 끌어안고 흐느끼고 있다. ‘결백 프로젝트’의 도움을 받아 석방된 베르무데스는 1991년 목격자의 잘못된 증언 탓에 16세 소년을 총으로 쏴 살해한 죄를 뒤집어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한해 탄원서만 3000통, 이달엔 映畵도

경찰 창고에 처박힌 증거를 꺼내 수감자의 무죄를 증명하는 '결백 프로젝트'가 미국에서만 259명의 누명을 벗겨내며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1992년 연구소 형태로 뉴욕 예시바대 법대 안에 만들어진 이 기구는 미국 33개 주를 비롯해 영국 아일랜드 뉴질랜드 캐나다 등 해외로 네트워크를 확산하며 50여개의 지역 사무소를 동시에 가동 중이다. 1990년대 초반 한 해 한두 건의 무죄를 증명하는 데 그쳤던 '결백 프로젝트'는 지난해에만 22명의 '억울한 수감자'를 감옥에서 빼냈다. 프로젝트 운영자인 배리 셰크 변호사는 프로젝트 홈페이지에 "얼마나 많은 결백한 이들이 감옥에 있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며 "우리가 지금까지 빼낸 이들은 아마도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오빠가 살인을 저질렀을 리 없어요. 저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10년째 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증인이 잘못 본 게 확실해요. 제 아들은 죄가 없어요" …. 매년 미국에서 접수되는 탄원서는 3000여통. 수천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현재 검토 중인 사건은 6000개가 넘는다. 수감자 가족들 사이에 프로젝트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접수 사건 수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달 15일에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18년 만에 무죄가 증명된 남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컨빅션(Conviction 유죄 선고·신념)'이 미국에서 개봉한다.

'결백 프로젝트'가 수십년 전 판결을 뒤집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단 하나, 유전자 검사다. 요즘의 범죄 수사물에서 지문 검사만큼이나 흔하게 등장하는 유전자 검사는 미국서 1989년에야 도입됐다. 지금도 유전자 검사는 수사의 의무 사항이 아니다. '결백 프로젝트'는 거꾸로 사법당국에 소송을 걸고 그들이 과거의 증거를 다시 꺼내도록 만들고 유전자 검사를 수행하게 한다.

◆증언 하나 때문에 35년 감옥생활

'결백 프로젝트'가 지난달 27일 인터넷에 공개한 무죄 증명 사건 데이터베이스는 감옥에서 빠져나온 259명 '결백자'의 사연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풀려난 제임스 배인(Bain·54)은 1974년 목격자의 증언만을 토대로, 남자아이를 성폭행한 죄를 뒤집어쓴 채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풀려 나온 2009년까지, 그의 삶의 절반 이상인 35년이 감옥에서 사라졌다.

도널드 게이츠(59)는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 27년 만인 지난해에야 결백이 증명됐다. "살해 현장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을 현미경으로 검사한 결과 게이츠가 범인이 확실하다"는 연방수사국(FBI)의 수사 결과가 그의 인생을 감옥에 묶었던 것이다. 성폭행 피해자가 "저 사람이 맞다"고 지목했다는 단 하나의 증언만으로 31년을 감옥에서 보내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풀려난 경우도 있다.

◆진범 검거가 강력범죄 예방책

259개 사건을 분석한 결과 이들이 감옥에서 보낸 기간은 평균 13년. 이들의 수감 시간을 모두 합치면 3160년에 달한다. 47%는 자기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고, 사형 선고를 받았던 사람도 17명이나 된다. 10명 중 7명 이상이 목격자의 잘못된 신원 확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백인 목격자가 흑인의 얼굴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 그릇된 증언이 발생한 경우가 특히 많았다. 수사관의 협박에 못 이겨 범행을 허위자백한 경우가 27%, 이 중 절반 이상은 17세 이하이거나 정신병을 앓는 '약자'였다. 출소자 중 60%는 정부와의 소송을 통해 보상금을 받아냈다. 보상금은 수감 기간에 따라 적게는 1만1200달러, 많게는 1225만달러다.

이들이 감옥에 들어갔을 때의 평균 나이는 27세였고 무죄가 밝혀져 출소했을 때의 평균 나이는 42세다. 뒤늦게 자유의 몸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감옥에서 허무하게 흘려버린 이들의 시간을 보상할 방법은 요원해 보인다.

셰크 변호사는 "진범을 잡았을 경우 72건의 강력범죄를 예방할 수 있었다"며 "억울한 수감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빼내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철저한 증인 검증, 수사 전(全) 과정 녹화, 증거물 보관기간 연장 등 수사 시스템 개선을 통해 무고한 사람이 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바로잡습니다

▲5일자 A18면 '美, 누명 벗기기 결백 프로젝트 전 세계 50개 도시로 급속 확산' 기사 그래픽 중 '1360년―누명을 벗은 이들이 감옥에서 보낸 기간의 합'에서 '1360년'을 '3160년'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