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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 인사이드] "월드컵, 그것도 주장완장 차고 뛸 거예요"

입력 : 2010.09.17 03:04 / 수정 : 2010.09.17 07:39

[Sport 인사이드] 韓·러 합작 '괴물 골키퍼' 포철中 김로만
따돌림 이기려 축구 시작 초등생 땐 6대회 무실점… 프로 구단 세곳서 '손짓'

"너는 어디서 왔니?" 수없이 들어온 말이지만 그때마다 설명을 새로 해야 한다. "아빠가 한국, 엄마가 러시아 사람입니다. 전 한국인이고요." 김로만(14)은 포항제철중 축구팀의 1학년 골키퍼다.

그는 최근 끝난 추계중등축구연맹전 저학년부 결승에서 무실점 방어로 팀에 우승을 안겼다. 6경기를 뛰며 허용한 게 딱 2점이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외모부터 튄다.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를 가진 로만이는 184㎝다.

다르게 생겨 놀림당하던 아이

미래의 국가대표 수문장으로 평가받는 소년의 아버지 김영식(39)씨는 1994년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건너갔다. 피혁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지금의 아내 김악사나(41)를 만났다. 악사나는 김씨 회사의 직원이었다.

한국인 아버지, 러시아인 어머니를 둔 김로만은 어린 시절 왕따를 당한 아픔을 축구로 이겨냈다. 김로만은“한국 국가대표가 꼭 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한눈에 반한 김씨는 급하게 배운 러시아어로 연애편지를 쓰는 '작업'끝에 1996년 결혼에 골인했다. 그해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로만'이다. 2000년대 들어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김씨는 한국으로 유턴했다.

유치원까지 러시아에서 다닌 김로만도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됐다. 또래와 다른 얼굴의 로만이는 자연스레 '왕따'가 됐다. "로만이가 지금도 가장 싫어하는 말이 '외국인'이에요."

아이들은 로만이를 한국인으로 보지 않았다. '헬로'라고 인사하며 놀리거나 밑도 끝도 없이 '토마스'라 불러댔다. 아버지는 "어릴 적 활발했던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 후 집 밖에 나가지 않는 내성적인 아이로 변했다"고 말했다.

로만이는 공을 가지고 놀며 외로움을 달랬다. 김씨는 아들에게 축구를 시켰다.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라는 기대가 담겨 있었다. 숭곡초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김로만은 6학년 경기에 나갈 만큼 발재간이 좋았다.

그때만 해도 드리블이 좋은 미드필더였다. 운동신경은 부모를 닮았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다. 아버지는 학창 시절 때 야구를 했고 172㎝의 '러시아다운' 키를 자랑하는 어머니 악사나는 어린 시절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다.

괴물 골키퍼의 탄생

의정부 신곡초등학교로 전학간 김로만은 5학년 때 축구를 그만둬야 했다. 당시 김영식씨는 미국 이민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족이 함께 외출하면 사람들은 '동물원 원숭이'를 보는 듯했어요. 누나가 있는 미국행을 생각했습니다."

축구를 그만둔 로만이는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다행히 아버지가 이민 계획을 도중에 접었다. 그리고 6학년으로 넘어가는 어느 겨울날 로만이는 아버지에게 "저, 골키퍼 하면 안 돼요?"라고 물었다.

김로만의 아버지 영식씨와 여동생 애니, 어머니 김악사나씨(왼쪽부터). 초등학생인 애니는‘제2의 신지애’를 꿈꾸며 함평에서 골프를 배우고 있다.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아버지는 주목받지 못하는 포지션을 반대했지만 아들은 처음 고집을 부렸다. 개인기는 좋았지만 스피드가 별로였던 로만이에게 골키퍼는 제격이었다. 제대로 차면 상대 골대를 넘을 정도로 킥이 좋았고 순발력도 뛰어났다.

레프 야신 등 수많은 명(名)골키퍼를 배출한 러시아의 피는 역시 달랐다. 김로만이 골문을 지킨 신곡초는 6개 대회를 휩쓸었고, 김로만은 이 대회에서 모두 무실점을 기록했다.

'괴물 골키퍼'의 탄생이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프로팀 포항과 수원·성남이 운영하는 세 곳의 중학교에서 동시에 러브콜을 보냈다.

그 중 포항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김태만 포항 사장이 직접 나서 로만이네 가족을 포항에 초대했고 홈경기장인 스틸야드를 둘러볼 때는 전광판에 '김로만군, 환영합니다'란 메시지를 띄웠다. 가족은 구단의 정성에 감복했다.

월드컵 대표의 꿈

포항제철중학생 김로만은 여전히 위력적이다. 포철중은 올해 춘계와 추계연맹전 저학년부 우승을 차지했다. 김로만은 13경기를 4실점으로 막았다. 로만이의 '롤 모델'은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의 수문장 이케르 카시야스다.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통솔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고 했다. 김로만은 "월드컵에 태극기를 달고 그것도 주장으로 나서고 싶다"고 했다.

"한국인인 걸 언제 느끼느냐"고 묻자 "항상"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로만은 "국가대표가 돼 비슷한 상황의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했다.

한창 사춘기라 말수가 부쩍 준 로만이는 집 근처 함평 공설운동장의 잔디를 밟고서야 웃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수없이 다이빙을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여드름이 송송 난 소년에겐 그라운드가 가장 행복한 곳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