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시 나의 인생] 지리산 시인 이원규

    입력 : 2010.09.07 23:08 | 수정 : 2010.09.08 11:21

    구례·남원·함양… 이제 산청만 남았다.

    서울살이 10년의 환멸 털고 맨몸으로 숨어든 지리산
    피아골 문수골 칠선계곡 살며 욕심 없이 자연에 녹아든 삶이
    그대로 詩와 글 된다

    지리산은 3개 도, 5개 시·군, 15개 면에 걸쳐 있다. 이원규는 지난 13년 지리산 기슭에서 이사를 일곱 차례 했다. 구례·남원·함양·하동을 옮겨다녔으니 이제 산청만 남았다. 그는 "이사라기보다 지리산 아래채에서 문간방으로, 문간방에서 건넌방으로 잠자리를 바꿨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난봄부터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난다는 화개장터 남쪽,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산다. 앞이 안 보이도록 폭우가 쏟아지던 날, 마을 안 언덕 맨 끝에 숨듯 들어앉은 그의 집을 찾았다.

    파란 감이 비바람에 떨어져 뒹구는 마당에 서니 섬진강이 한눈에 든다. 며느리 옷고름처럼 순하디순하게 흐르던 섬진강은 누런 황토물로 몸을 불려 거칠게 바다로 내달린다. 방 셋에 마루, 너른 부엌을 들인 기와집은 그가 살아온 지리산 집 중에 제일 번듯하다. 한 해 세(貰) 70만원짜리다.

    이원규는 빈집 구하기 달인이다. 우편집배원에게 막걸리 한잔 건네며 "그 마을 할머니 돌아가시면 알려 달라"고 한다. 그 집 초상 일을 1박2일로 거들어 주곤 "그냥 두면 폐가가 되니 내게 맡겨라"며 월 몇만 원에 빌린다. 이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지금 집은 강 건너 광양 매화마을에 들렀다가 그 먼 거리에서 한눈에 알아봤다.

    이런 집엔 돌아간 분들이 쓰던 가구도 그대로 있어서 맨몸만 오면 그만이다. 그는 "소유한 붙박이 집이 없기에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누릴 수 있다"고 했다. 대신 가장 큰 재산이 오토바이다. 열한 대를 갈아치운 끝에 중고 장거리용 BMW와 산악용 스즈키를 장만했다. 그가 오토바이에 애착을 품는 데엔 사연이 있다.

    이원규는 62년 경북 문경 마성면 하내리 탄광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점방을 차린 홀어머니 아래서 어렵게 컸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탄광 폐석 더미를 뒤져 쓸 만한 석탄을 골라 왔다.

    광에 100자루쯤 쌓이면 한 자루 3000원씩에 내다 팔아 아들 등록금을 댔다. 중학생 이원규는 30㎏도 넘는 탄 자루를 지고 오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형의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 모셔오곤 했다. 험한 산길을 오토바이로 달리던 기억이 이제 그의 유랑 본능과 맞아떨어졌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는 고1 때 가출해 백화산 만덕사에서 2년 넘게 행자로 살았다. 그때 고시생 방에 있던 세계 명시선집을 보며 '이런 게 시(詩)구나' 싶었다. 그는 신군부 시절 '법난(法難)' 때 절을 뒤지던 군경에게 붙잡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검정고시를 거쳐 계명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이원규는 독서서클에서 시를 써보기 시작했다. 이성복 시인의 국문과 강의도 얻어들었다. 84년 월간문학과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뒤엔 휴학하고 고향 탄광에서 등록금을 벌었다. 형제 중에 혼자 대학 다닌다는 마음의 빚을 덜려고 지하 700m에서 2년 넘게 갱목을 나르고 곡괭이질을 했다.

    그는 졸업 후 서울에서 일간지와 자매 월간지 기자로 일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직장에 매여 살 사람이 못 됐다. 어머니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려고 가까스로 누르고 있던 서울살이 10년의 환멸이 97년 어머니 돌아가시자 봇물처럼 터졌다.

    그는 지리산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듬해 초 사표를 내고 서울역부터 갔다. 밑바닥 삶을 견뎌 봐야 지리산에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몇천 원만 주머니에 넣고 보름 동안 서울역 지하도에서 신문지 덮고 자고 급식 줄을 섰다. 그 '훈련'을 마치고 구례행 전라선 밤기차에 올랐다. 모든 걸 청산하고 신동엽창작상 상금에서 남긴 200만원만 손에 쥔 채였다.

    이원규는 알던 스님이 비워 둔 구례 토지면 섬진강변 집에 들어가 사흘 밤낮 잠만 잤다. 깨어 보니 내가 아는 사람,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통쾌했다. 주먹밥 싸들고 산짐승처럼 지리산 골짜기들을 헤매고 다녔다.

    그는 이듬해부터 구례 피아골, 남원 실상사, 함양 칠선계곡, 구례 마고실마을과 문수골을 돌며 빈집이나 절방을 얻어 살았다. 한 번 이사할 때마다 시집이나 산문집을 한 권꼴로 냈다.

    수박향 은어회에 막걸리 한잔, 선유동계곡의 알몸 목욕, 달빛을 낚는 달밤의 투망질들이 자연스럽게 시가 됐다. 이웃집 할머니가 투박한 음식일망정 감잎 두 장을 곱게 덮어 집 마루에 놓아 주시던 마음 씀도 그대로 글이 됐다.

    그는 생명운동도 벌이며 지리산·낙동강 2만리를 걷고 오토바이로 전국 50만㎞를 달렸다. 지리산이 좋다 보니 우리 산하가 다 좋더라고 했다. 올가을부터는 사라져 가는 비포장도로 2000㎞를 틈틈이 오토바이로 돌 생각이다.

    이원규는 적어도 일흔은 넘게 살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지리산 큰 골짜기만 서른 개쯤이니 다 살아 보려면 1년에 한 번 이사해도 30년은 걸리기 때문이다. 그는 "지리산에 오려거든 등산이 아니라 입산하러 오라"고 이른다. 등산은 정복과 교만, 입산은 자연과 한 몸 되는 상생의 길이라 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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