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만나고 사흘이 지났지만, 청와대와 박 전 대표측은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일체 비밀에 부치고 있다.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23일 브리핑에서 '궁금해하는 국민들이 많다'는 질문에 "중요한 내용은 충분히 설명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동 이후 공개된 내용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경제 문제를 포함한 국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앞으로 한나라당이 국민의 신임을 잘 얻어 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을 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같이 노력해야 한다는 대화가 있었다"는 게 전부다.
천안함 사태 이후 미국·중국과의 관계, 대화가 단절된 북한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 야당이 반발하는 4대강 사업, 이 대통령의 친서민 정책, 부동산·교육 문제 등 국민이 관심을 갖는 중요한 현안이 모두 여기 해당될 수 있다. 거기에 인사청문회에서 각종 의혹이 드러난 후보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 개헌 추진 여부, 행정체제 개편 등의 굵직한 정치적 이슈들도 걸려 있다. 영향력 1·2위의 두 정치인은 그동안은 세종시 수정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만나 웃는 얼굴로 "지금까지 만남 중 가장 좋은 결과"라고 할 정도가 됐다면 무슨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양측은 그러나 "두 분만 알 뿐 누구도 모른다"는 말만 하고 있는 것이다.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이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분이 서로 마음이 통하고 좋은 결론을 얻는 것"이라며 "그런데 지금까지 두 분의 만남은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도 사후에 이런저런 말들이 나와서 의미가 퇴색됐다. 이번엔 그런 점을 감안해야 했다"고 말했다. 좋지 않은 관계였던 두 사람이 이제 겨우 1단계를 시작한 것이니 사정을 이해해 달라는 얘기다.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 회동은 성사되는 과정의 모양새도 정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양측은 만나는 사실을 사전에 공개하지 않았다. 청와대가 찍은 사진 2장만 있을 뿐 동영상은 남기지도 않았다. 두 사람 외에는 기록자도 없었다고 했다. 만난 뒤 바로 공개한 것도 아니고 언론의 취재가 시작되자 하루 뒤 어쩔 수 없이 공개했다. 이에 대해 양측은 "만나겠다고 두 분이 이미 얘기했고, 만난 다음 날 공개했는데 그게 왜 비밀회동이냐"며 "정치인들 만남의 성격상 과정과 내용을 전부 공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형태가 된 이유는 서로 "저쪽 요구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정진석 정무수석은 22일 "어떤 내용을 외부에 밝힐지는 전적으로 박 전 대표가 알아서 하기로 했다"고 했다. 반면 박 전 대표 측근은 "만나게 된 것도, 만남을 비공개로 한 것도 전부 청와대 요구"라고 했다.
두 사람이 이처럼 '별난 만남'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 사정을 짐작 못 할 바는 아니다.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약하다. 하지만 국정 안정과 재집권을 위해 만나기는 해야 한다. 그런데 만날 때마다 감정은 더 나빠졌다. 중요한 원인은 중간의 제3자들이 자기 정치적 이해에 따라 사전에 흘리거나 사후에 각색해서 결과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런 구조에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비밀리에 추진하고, 결과 발표는 전적으로 박 전 대표가 알아서 한다'는 것 외에 없었다"고 했다. "친박(親朴) 진영은 대통령과 사진 찍는 것도 '정치적 쇼'에 당하는 것이라고 싫어하니 만나는 장면을 공개할 수도 없다"고도 했다.
박 전 대표측은 "지금까지 청와대 쪽에서 만남의 결과를 왜곡하거나 자기들 뜻대로 흘렸기 때문에 불신이 쌓였던 것"이라며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지 비밀회동을 요구한 적은 없다"고 했다. 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뒷말이 나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그래서 차라리 안 만나는 것이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이런 특단의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전문가들은 "한두 차례라면 모를까 이런 식의 만남은 궁극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김정일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여권을 대표하는 두 지도자가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지 개인끼리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신율 교수도 "현대사회는 투명성이 강조되는데 이런 식의 만남은 '음모론'을 조장하게 된다"며 "왜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양측이 솔직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