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데스크] 1억명의 시오노 나나미

    입력 : 2010.08.13 23:30

    정우상 정치부 외교팀장

    일본의 역사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는 국내에 많은 독자를 갖고 있다. 총 15권으로 이뤄진 '로마인 이야기'는 국내에서만 300만부(794쇄) 넘게 팔렸다. 문고판을 제외하면 일본보다 더 팔렸다는 말까지 있다. 국내에선 출간되지 않은 '일본인에게-리더(leader)편(篇)'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한·중·일 과거사 해법에 대해 하나의 제안을 했다.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역사 저술자의 제안이라니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녀는 과거사 문제를 재판에 비유했다. 한국과 중국을 원고(原告), 일본을 피고(被告)로 규정했고, 배심원은 다른 나라들이 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래 피고인들은 유능한 변호인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단죄(斷罪)를 피하려면 철저히 증거를 수집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왜냐하면 원고측(한국과 중국)은 탁자를 치며 목소리를 높이는 전법(戰法)을 잘 쓰기 때문에 일본인은 침묵해버리기 쉽고, 침묵하고 있으려면 증거를 통해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증거 수집을 위해 그녀는 20세기 전반부터 50년간 일본의 모든 공문서를 모아 공개하자고 했다. 공문서를 공개하고 영어 번역문도 만든다. 그리고 이에 대한 판단은 제3자에 맡기자고 했다.

    기록이나 문서에는 강자의 논리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勝者)들이 써온 것이다. 일본이 한국 등 아시아를 침략한 시기의 공문서에 제 한 몸 추스르지도 못했던 피해자의 입장이 반영됐을 리 없다. 우리가 위안부나 징용자 문제를 제기하면 일본은 "증거로 말하자"고 한다. 깡패들은 고리(高利)를 뜯는 근거로 각서를 내민다. 그 각서엔 주먹을 휘두르며 겁을 줬다는 건 기록돼 있지 않다. 공문서만으로 당대의 진실을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억지이고 사기다.

    시오노 나나미는 결국 속내를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아시아역사자료센터'라는 곳이 공문서를 수집하고 있다면서 "이런 센터를 통해 '일본은 역사를 마주 보지 않는다'는 비난에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센터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10배 늘리자면서 "공문서를 데이터화하는 데 20년이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자기비판이나 사죄를 유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산을 10배 더 지원하는 건 싸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오노 나나미는 2006년 '로마인 이야기' 15권을 마무리하면서, "민족도, 종교도, 취향도 다른 사람들이 서로 공생하며 함께 할 수 있었던 시대의 역사를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평생 로마를 연구한 작가가 정작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선 "자료 정리 때까지 사죄는 미루자"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 역사 저술가의 견해라면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인식이 일본에선 특별한 게 아니다. 필자가 일본에서 보았던 마음씨 좋은 복덕방 아저씨부터 패션모델까지 과거사 얘기만 나오면 "증거를 대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남의 나라를 강제 점령하고, 독립 만세 불렀다고 7500명을 죽이고, 강제 징병과 징용으로 수없이 목숨을 빼앗고, 식민지 여성들을 위안부로 학대했던 나라의 사람들이 "증거를 대라"고 하는 것은 '너희가 못나서 당해놓고 왜 징징거리느냐'는 것이다. 일본에는 시오노 나나미와 같은 사람이 1억명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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