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내 아버지는 聖者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입력 : 2010.08.14 03:05 | 수정 : 2010.08.15 04:49

    '영화 같은 가족사' 故손양원 목사 묘 찾은 안경선 목사 "애양원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목회자 돼 찾아오고 싶었습니다"

    高3 겨울 아버지의 유언 "신학교에 가거라" 그리고…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진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故손양원 목사 그분은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학생을 양아들로 키웠던 겁니다 그분의 땅 '애양원' 내 '양할아버지'의 묘소를 이제서야 찾아왔습니다

    지난 한 세기에 걸쳐 나병(한센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천국'이라고 불리며 사랑받아 온 '애양원'. 그러나 '천국의 문'에 들어서는 안경선(50) 목사의 발걸음엔 긴장과 망설임이 역력했다. 근 40년 만의 '귀향'이었다. 아버지의 기구한 삶의 흔적이 씻기지 않고 남아 있는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 한국 기독교의 5대 성자(聖者)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손양원(1902~1950) 목사가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고 손으로 씻어내며 사랑을 실천한 성지로 이름 높은 곳이지만, 안씨에게 '애양원'이라는 세 글자는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금기(禁忌)였다.

    聖者 손양원, 그리고 나의 아버지 안재선

    9월 28일로 손양원 목사 순교 60주기를 앞둔 애양원은 분주했다. 경상도 함안 출신으로 전라도 여수에서 선교하다 6·25전쟁 때 공산군에 의해 총살된 손 목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한창이었다.

    안씨가 처음 애양원과 손양원 목사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다.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사랑의 원자탄'을 교회에서 단체로 보러 갔었어요. 여학생들 보려고 친구 따라 막 교회 나가던 즈음인데, 풋내기 어린 신자의 눈에도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다 순교한 손 목사님 생애는 크나큰 감동이었습니다. 목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 처음 하게 되었지요."

    고난의 가족사를 담담하게 털어놓는 안경선 목사의 얼굴은 오히려 평안해 보였다. 고심 끝에 인터뷰를 결심한 것은“‘손자’로서의 도리 때문”이라고 했다.“ 60년 전 손양원 목사님이 내 아버지에게 심어주신 사랑의 씨앗이 이렇듯 열매 맺고 꽃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영화의 절정은 손양원 목사가 1948년 발생한 여순반란사건에서 두 아들을 잃는 대목이다. 반란군 쪽에 선 공산주의 추종 학생들에 의해 예수쟁이에 친미파라는 이유로 두 아들이 총살당하는 장면. 반란이 진압된 뒤 두 아들을 죽인 학생들 중 한 명이 체포돼 사형장으로 끌려가는데, 손 목사는 이 학생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탄원한다. "이 아이를 죽이면 내 아들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이 아이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 사람 되게 하겠습니다"고 애원하면서. 고교생이던 안씨는 이 대목에서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1년 뒤, 안씨는 손양원이라는 이름과 다시 만난다. 후두암을 앓던 아버지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48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던 1979년 12월 19일. 빈소를 지키던 상주인 그에게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손양원 목사의 아들 손동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안씨의 손에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의 책을 안겨주고 돌아갔다. "내가 네 작은 아버지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영화의 원작이었어요. 저분이 아버지와 어떤 사이기에 장례식에 온 걸까, 이 책을 왜 나에게 준 걸까 의아해하다가 상을 치른 뒤 책을 찬찬히 읽어내려갔지요.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손양원 목사와 내 아버지의 관계를…. 그러니까…,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그 학생이 나의 아버지 안재선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인 자, 그 씻을 수 없는 주홍글씨

    그제야 안씨는 아버지의 유언이 떠올랐다. "신학교에 가거라." 평소 맏아들이 교회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던 아버지였다. 당황스러웠다. 책이 그 의문을 풀어줬다. "손양원 목사님은 양아들인 아버지가 목회하기를 원하셔서 부산고려고등성경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아버지도 신학 공부를 즐거워하셨고, 동기들과 교수들로부터 총명하고 유머러스한 신학도로 인기가 많았답니다. 빈민촌 공부방 교사로서도 열심히 활동했고요." 하지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의 사슬에서 아버지는 방황하고 좌절했다. "어느 누가 '사람을 죽인 자'로부터 복음을 듣고 싶어할까요. 죽을 때까지 견뎌내야 할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 그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게 두려우셨을 겁니다."

    신학을 포기한 아버지 안씨는 손양원 목사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여수 앞바다의 무인도로 들어가 양식업을 시작하지만 실패한 뒤 일가족을 데리고 상경했다. 서울 상계동에 정착해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내와 자식들에게 애양원과 손 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함구한 것은 물론이다. 훗날 들은 이야기이지만, 안씨 아버지는 손양원 목사의 유복자인 손동길 목사를 비롯한 남은 자녀들과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식을 주고받았다고 했다.

    "가난한 월급쟁이로 살면서 4남매를 키우셨어요. 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오시는 날이 태반인 데다 워낙 과묵하고 엄한 성격이라, 부자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과거는, 손양원 같은 목사가 되고 싶었던 아들에게 족쇄를 채웠다. 자신의 소망대로, 또 아버지의 유언대로 한국그리스도의교회 소속 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에 입학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손양원'과 '안재선'이라는 두 이름이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었지요. 아버지를 이해할 순 있었어요. 아버지 또한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비극이 낳은 희생자였으니까요. 하지만 머리로만 이해할 뿐, 사람을 죽인 자, 그의 아들인 내가 신학을 해도 되는 걸까, 의심했고 자학했죠." 자학은 그의 몸을 상하게 했다. 한쪽 폐가 썩어들어가고 있었지만 쓰러져 병원에 실려갈 때까지 오기로 버텼다. "이렇듯 잔인한 운명을 만들어낸 신을 한껏 비웃어주고도 싶었습니다."

    급성폐렴에 합병증까지 겹쳐 한쪽 폐를 도려내는 대수술을 한 뒤 안씨는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 신학교로 돌아갔다. "손양원 목사가 당신의 양아들이 못다 한 삶을 나에게 주었다는 깨달음, 그리고 언제까지 그들의 굴레에서 방황하며 살 수 없다는 용기가 내 몸 어딘가에서 기적처럼 샘솟았습니다."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냐, 사람이 중하지

    지난 10일, 오랜 여정을 돌고 돌아 마침내 찾아온 아버지의 땅. 애양원 성산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있는 이광일 목사가 "왜 이제 오셨습니까" 하며 안씨의 두 손을 잡았다. "꼭 한번 오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었습니다." 안씨의 목소리가 낮게 잠긴다. 청주 변두리에서 목회를 시작해 해남, 원주, 성남으로 옮겨다니면서 사역한 지 20여 년. 하지만 한순간도 애양원을 잊은 적이 없다. '언젠가는 꼭 가야지' 하면서도 자꾸 미뤘던 것은 자신의 처지 때문이기도 했다. "손양원 목사님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목회자가 되어 내려가야 애양원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 또한 사람의 어리석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이광일 목사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제가 손 목사님의 생애를 기록한 자료들을 오랫동안 찾고 정리해왔는데, 손 목사님 또한 '인간'이더군요. 처음 나환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 진동하는 악취에 코를 막고 고통스러워했다는 대목을 발견하고 저 또한 어찌나 위안을 받았는지 모릅니다.(웃음) '저들이 내 눈에 천사로 보이게 해달라'고 몇날 며칠을 기도한 뒤에야 비로소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었고, 다시 힘들어지면 기도로 극복하면서 평생 그들의 반려로 사셨다는 거죠."

    이 목사의 안내로 손양원 순교기념관에 들어선 안씨는 몇 번씩 발길을 멈춰야 했다.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가 글과 그림, 사진으로 도배돼 있는 기념관에 '아버지'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또래보다 큰 키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지닌 청년 안재선은 손양원 목사를 따라 부흥회에 참석하고 있었고, 손 목사의 장례식에서는 상복을 입고 맏상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용서하고 있는 손양원 목사'라는 제목의 그림 앞에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총에 맞아 쓰러진 장남과 차남, 그 기막힌 죽음 앞에서 손 목사는 총을 쏜 청년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제아무리 성자로 존경받는 사람이라지만 자식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을 쉽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당시 곁에서 손 목사님을 지켜보셨던 생존자들은 말합니다. 재선이와 마주앉아 밥을 먹을 때는 돌멩이를 삼키는 것처럼 마음이 괴롭다, 털어놓으시더라고. 하지만 재선 앞에서는 언제나 의연하셨답니다. 네 실수를 나는 벌써 용서했다, 아니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셨다, 위로하시면서."

    아버지 안재선의 총에 숨을 거둔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의 묘 앞에 선 안경선 씨. 뒤로 손 목사 내외의 비석이 보인다. 안 씨는 굵어지는 빗방울에도 한참을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 여수 =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너의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이고 마시우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장)

    애양원 내 나환자촌 중턱에 자리한 손양원 목사의 묘지로 향할 때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손 목사의 무덤 아래 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의 무덤이 함께 있었다. 이데올로기가 다 무엇이냐, 사람이 중하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버려서는 안 된다며 두 아들의 '원수'를 품어 안았던 성자. 이광일 목사는 "사랑과 통합이 절실한 이 시대에 손양원 목사의 생애는 큰 메시지로 다시 읽혀야 한다"고 말했다.

    굵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안경선 목사는 '할아버지' 손양원의 가르침을 들었다고 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자, 그들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자들만이 천국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다고, 그러니 네 어깨에 얹어놓았던 무거운 짐과 허울, 죄의식 따위는 이제 그만 던져버리라고….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