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8.29 ~ 1910.8.29

'105인사건'은 일제가 한국의 항일 민족운동 세력과 이들을 배후에서 돕던 미국 선교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미국 선교사들 가운데 평북 선천의 신성학교 교장으로 있던 조지 맥큔(George S McCune· 1872~1941·한국명 尹山溫)이 일제의 의심을 많이 받았다.

미국 파크대학 출신의 맥큔은 1905년 아내 헬렌 매카피 맥큔 여사와 함께 미국 장로교 선교부 소속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부임 후 4년 동안 숭실학교에서 베어드 교장을 돕던 맥큔은 1909년 선천의 신성중학교 교장으로 전근되었다. 선천은 읍민의 절반가량이 기독교인이 될 만큼 기독교가 놀라운 힘으로 퍼져나간 지역으로 평양·정주와 더불어 서북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다. 교장 부임 후 맥큔은 미국에서 거액을 지원받아 기숙사를 짓고 농장을 마련하는 등 학교를 크게 변화시켰다.

1911년 10월 신성학교 아침 기도회 시간에 학생과 교사 30여명이 일경에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일제는 이들에게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맥큔도 의심을 받았다. 한해 전인 1910년 12월 28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한 데라우치 총독이 귀경길에 선천역에 잠시 하차하여 맥큔 교장과 악수할 계획이었는데, 이때 반일본 분자들이 데라우치를 암살하도록 사주했다는 것이다. 맥큔은 평소 성경 공부시간에 학생들에게 다윗과 골리앗의 예화를 통해 정의로운 약자가 강자를 이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는 했으나 그 혐의는 거짓이었다. 일제는 맥큔의 관련 증거를 찾았지만 나오지 않자 체포하지 못했다.

선천 보성학교 책임자였던 맥큔의 부인은 이 사건을 미국 교회에 가장 먼저 알렸다. 맥큔은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총독 면담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며 일경의 고문에 항의했다.

'체포된 사람들과 교사들은 수년 동안 우리와 아주 가까이 지낸 사람들이요, 검증된 사람들로 음모 계획을 범하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그들은 정직하고 평화적인 사람들이다. 경찰의 심문 과정에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1912.1.8.)

일경은 체포한 한인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며칠씩 굶기는 것은 물론 물고문, 손발톱에 대나무 못박기, 입안에 석탄가루 쑤셔넣기 등 70여 가지 악랄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맥큔의 신성학교 제자인 백낙준은 후일 105인사건을 가리켜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제1착(第1着)'이라고 규정했다.

맥큔은 그후에도 한국의 애국 청년들을 보호했다. 3·1운동에 참가한 신성학교 학생들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일경의 가택 수사를 거부했다. 1920년 8월 미 국회의원단이 방한했을 때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진정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의원들에게 전달했다. 그해 9월 선천경찰서 폭탄 투척사건의 주모자로 자처한 박치의(18세)가 꽃다운 나이에 순국할 때 맥큔은 영결기도를 올렸다〈사진·1926년경 일가족. 앞줄 두 사람이 맥큔 부부〉.

투철한 배일사상으로 한국 근대교육과 항일운동에 크게 기여한 그는 1936년 3월 총독부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가 평양을 떠나던 날 형님 아우라고 부르며 따르던 수천명의 평양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전송했다. 선천에서 태어난 두 아들도 외교관과 학자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