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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 인사이드] "단맛 쓴맛 다 봤는데, 또 고꾸라지기야 하겠습니까"

입력 : 2010.08.06 02:59

모래판 명물에서 족발집 사장으로… 박광덕의 인생유전
실패로 끝난 연예계 생활, 사기당하고 빚만 10억… 죽어라 뛰며 '세상 공부'
이젠 평범하고 재미있게…

박광덕은 선수 시절 상대를 쓰러뜨리고 엉덩이를 흔드는‘람바다’뒤풀이를 펼치며 씨름판의 명물이 됐다. /이기원 기자

인천 부평동의 한 족발집. 돼지고기 삶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20평 남짓한 가게에 들어서자 박광덕(38)이 서 있었다. 1990년대 초중반 모래판에서 '람바다춤'을 덩실덩실 췄던 바로 그였다.

그는 여전히 거구였다. 체중 150㎏를 감싼 앞치마가 '쫄티' 같았다. 그가 든 큰 식칼이 두꺼운 팔뚝과 솥뚜껑 같은 손바닥 안에선 과도(果刀) 같아 보였다. 밝은 갈색으로 물들인, 약간은 촌스러운 헤어스타일도 그대로였다.

박광덕은 1990년 프로 데뷔 후 천하장사 1품(준우승) 5번, 백두장사 3번을 차지했다. 그 여세를 몰아 1995년 연예계로 나갔지만 실패했다.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와선 예전의 실력을 되찾지 못했다. 그러면서 점점 팬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더니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죽었다" "외국으로 잠적했다"는 것이었다. 지난달 17일 족발집을 연 그가 말했다. "생전 처음으로 저 혼자 힘으로 일으켜 세운 가겝니다. 힘들게 돌고 돌아 겨우 삶의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장사(壯士)가 울었다.

9개월짜리 인기

박광덕은 제2의 강호동처럼 되려 했다. 지상파 방송사 두 곳에서 예능 프로그램 고정 코너를 제의했을 정도였다. 그 역시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술자리에서 좌중을 휘어잡는 말재주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기는 '9개월짜리'였다. 예능 감(感)은 삼류 개그맨보다 못했다. 낯선 방송용어 외우기도 벅찼다. 씨름판에선 넘쳐흘렀던 끼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사라졌다. 넘치던 자신감이 바닥을 출렁였다.

쉬운 장면에서도 수차례 NG가 났다. 연출자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아홉 달 만에 그는 씨름판으로 돌아가겠단 결심을 굳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격언을 떠올렸다"고 했다.

10억 빚과 자살 기도

연예계 생활 9개월이 남긴 것은 10억원 가까운 빚이었다. 운호고 졸업 후 LG 씨름단에서 한 달에 1000만원 가까운 돈을 받았던 그는 연예계 데뷔 초기 한 달 수입이 2000만원은 거뜬히 넘었다.

족발집을 개업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박광덕이 고기를 썰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삶의 밑바닥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이젠 뭐든지 잘하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김용국 기자 young@chosun.com

그의 돈을 보고 불나방같이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룸살롱을 하자, 호프집을 하자…. 그럴 때마다 수천만원이 날아갔다. 가랑비에 옷젖는 줄 모르다 한 방에 거액의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투자계약서인 줄 알고 앞뒤 살피지 않고 서명한 서류를 나중에 알고 보니 사채(私債)를 빌려 쓴다는 계약서였다고 한다. 그는 "꼬이는 똥파리들을 나비로 착각했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모래판으로 돌아가는 길도 꼬였다. 본의 아니게 한보건설과 LG증권 씨름단 사이에서 '이중계약'이라는 오해를 샀고 곧바로 씨름계에서 '팽' 당했다. 순식간에 그는 담뱃값 2000원이 없어 돈을 빌리러 다니는 처지가 됐다.

박광덕은 서울 논현동 원룸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수없이 했다. 목, 배, 손목… 칼을 안 대본 곳이 없었다. 하지만 왼쪽 손목을 살짝 그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무 아파서 죽을 생각이 싹 사라졌다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기

그는 "이리 힘들게 죽을 바엔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박광덕은 "20년 같은 2개월을 보내던 중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고 했다. 연예계를 떠난 지 두 달 만인 1995년 11월에 LG에서 다시 받아주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입에서 단내 나도록 훈련했지만 운동을 그만두면서 술과 야식(夜食)으로 198㎏까지 불어버린 몸이 쉽게 전성기 때 체중(150㎏)으로 돌아올 리 없었다. 구단도 '홍보용'으로 영입했다고 그에게 이미 말해둔 상태였다.

그는 그래도 좋았다. 모래의 감촉도 그리웠지만 무엇보다 월 200만원가량의 고정수입이 있었다. 그렇게 그는 2000년 은퇴할 때까지 경기장에 얼굴 비추고 간간이 TV 리포터로 나서며 차츰 빚을 갚았고 1998년 결혼도 했다.

은퇴 직후에도 삶은 쉽지 않았다. 일이 없어 세금계산서에 찍힌 1년 수입이 400만원에 불과했다. 한 번에 30만~50만원씩 받아가며 지방 이곳저곳 나이트클럽과 결혼식, 칠순잔치 등을 돌아다니며 행사 진행을 봤다.

빚을 갚기 위해 전성기 시절 충남 예산에 사두었던 야산과 땅도 팔았다. 하지만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박광덕에겐 그깟 어려움은 별것 아니었다. 1998년에 포르노 영화 출연 제의까지 받아봤던 그였다.

젊은 시절 잃은 10억으로 세상 공부를 많이 했다. '조폭 세계'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이미 얼굴 다 팔렸는데, 신문 사회면에 한번 나오면 인생 정말 끝장이잖아요."

으라차차 박광덕

빚을 다 갚은 것은 2005년 후반이었다. 박광덕은 "족쇄가 풀리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일이 점점 잘 풀릴 것 같은 희망도 보였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다. 마음이 여유로워지니 방송도 더 잘 됐다. 이런저런 방송에서 그를 찾더니 행사 진행비도 200만~ 300만원으로 뛰었다. 5년 전부터는 인천의 나이트클럽에서 DJ도 보고 있다. 일주일에 4~5번씩 밤 12시면 출근해 17분간 음악을 틀며 손님들에게 음담패설하는 일이다.

30번 출근에 700만~1000만원 정도가 들어온다고 한다. 요즘 같은 휴가철이면 밤일도, 행사도 끊기지만 그는 고민하지 않는다. 박광덕은 "모아놨던 것 아껴쓰고, 다시 가을에 벌면 된다"며 "현실을 아는 정상인이 됐다"고 했다.

박광덕의 꿈은 5층 빌딩을 갖는 것이다. 5형제가 한곳에 모여 하고 싶은 장사 하며 사는 것이라고 한다. 빌딩 이름도 '형제빌딩'으로 벌써 지어놨다. "이젠 절대 고꾸라지진 않을 겁니다. 평범하고 재미있게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