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223] 민영환 자결 후 솟은 혈죽(血竹)

  • 전봉관 KAIST교수·한국문학

    입력 : 2010.07.27 03:02

    1909. 8. 29.~1910. 8. 29.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1861~1905)〈왼쪽 사진〉은 전 의정대신 조병세(1827~1905)와 함께 역적을 벌하고 조약을 파기할 대책을 상의했다. 조병세는 고령으로 낙향했다가 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79세 노구를 이끌고 상경했다. 그들은 조병세를 소두(疏頭: 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로 백관(百官)이 연명한 상소문을 올리고 외무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오적(五賊)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했다. 일본 헌병은 황제의 윤허도 얻지 않고 조병세를 체포하고 상소를 올린 백관들을 강제 해산했다.

    민영환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소두가 되어 백관들을 거느리고 거듭 상소를 올리며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민영환 등은 '충성스러운 마음을 알았으니 그만 물러나라'는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궁중에서 농성하다가 평리원(平理院: 재판소)에 구속되었다가 하루 만에 석방되었다. 민영환은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기울어가는 국운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칼로 자신의 몸을 수차례 찔러 자결했다.


    "슬프다, 국가와 민족의 치욕이 드디어 이에 이르러, 우리 인민이 장차 생존경쟁 속에서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노니, 영환은 죽었다 하여도 죽은 것이 아니라."(민영환의 유서)

    민영환은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민태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가 그의 고모여서 고종의 외사촌이었고, 그의 중부(仲父) 민승호가 명성황후의 부친 민치록의 양자여서 명성황후의 조카였다. 민영환은 17세에 과거에 급제해 민씨 척족의 지원으로 군부대신, 참정대신, 외부대신, 탁지부대신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96년에는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했고, 이듬해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식에 참석하는 등 외교관으로도 활약했다. 그가 자결한 다음날 조병세가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고, 전 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 평양 진위대 군인 김봉학 등이 잇따라 자결했지만, 국가를 망국으로 이끈 국정의 실세 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제와 백성에게 사죄한 인물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

    민영환이 자결한 지 8개월이 지난 1906년 7월 그가 자결하면서 피를 흘린 집안 나무 바닥에서 대나무〈오른쪽 사진〉가 자란다는 사실이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보도되었다. 대나무는 민영환의 피에서 자라났다고 '혈죽(血竹)'으로 명명되었고, 민영환의 자택에는 혈죽을 구경하고 그의 넋을 기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민영환은 대한제국의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되었고, '혈죽'은 민족 부활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충정공(忠正公) 곧은 절개 포은(圃隱) 선생 우희로다/ 석교(石橋)에 솟은 대도 선죽(善竹)이라 유전커든/ 하물며 방 중에 난 대야 일러 무삼하리오" ('혈죽가', 대한매일신보, 1906.7.21.)

    민영환의 부인 박수영이 보관하고 있던 혈죽은 광복 이후 그의 유품과 함께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되어 지금도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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