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회에서 '내집'은 단순한 물리적 거주지가 아니다. 온 가족이 의지할 수 있는 상승의 사다리인 동시에 최악의 빈곤에 떨어지지 않게 받쳐주는 버팀목이다. 집이 있으면 가장이 실직해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진 않지만, 집이 없는 가정은 위기에 극도로 취약하다. 확대성장 시대, 가족을 견고하게 묶어주고 계층 상승의 꿈을 담게 했던 '주택의 사다리'는 그러나 지금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집을 잃자 꿈이 사라졌다

경기도 과천 '꿀벌마을'의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홍승순(59)씨는 '내집'을 발판으로 경제적 신분 상승을 이뤘다가, 집을 잃은 뒤 가족 전체의 운명이 반전된 경우다.

홍씨는 결혼 후 시댁에서 마련해준 종자돈으로 의류 수입 사업에 뛰어들어 30대 나이에 서울 논현동에 빌라(122㎡·37평)를 마련했다. 홍씨는 그 집을 발판 삼아 더 위로 도약했다. 집을 담보로 사업자금을 융통해 건설공사 현장에 임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회사를 차린 것이다.

사업은 잘 됐고, 서울 서초구에 빌라(158㎡·48평)를 한 채 더 샀다. 주위에서 '알부자'라고 했다. 아들만 넷을 둔 홍씨 부부는 남편과 부인이 각각 자가용을 몰았고 휴가철이면 해외여행도 갔다. 홍씨에게 집이란 상승의 사다리였다.

그러나 '상승'은 여기까지였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홍씨는 어음을 막지 못해 집 두 채를 모두 날렸다. 온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잠드는 것조차 사치였다.

“여기‘비닐하우스 동네’에 600명이 살아요”… 경기도 과천‘꿀벌마을’에 사는 홍승순씨가 비닐하우스를 개조해서 만든 살림집을 정리하고 있다. 홍씨는“여기 말고는 갈 데가 없다”며“목돈을 마련해야 집을 구할 텐데 아무리 일해도 버는 것보다 집값이 더 뛰어오른다”고 했다.

홍씨 부부는 자녀 넷을 각자 두 명씩 데리고 흩어졌다. 홍씨는 과천 주암동에 월세 25만원짜리 원룸을 구했다. 홍씨는 "월세 내는 날이 너무 빨리 돌아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고 했다. 공공근로 수입(월 50만~60만원) 절반을 월세로 내고 나머지로 버티다 보면 금방 다음 월세 날이 닥쳤다.

고민 끝에 홍씨 부부는 과천 경마공원 뒤편 화훼단지에 들어갔다. 비닐하우스 300동 가운데 꽃을 기르는 곳은 절반 정도. 나머지 절반은 홍씨처럼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비바람을 피하는 무허가 살림집이다. 홍씨는 비닐하우스 위에 검은 막을 쳐서 직사광선을 가린 뒤 판자벽을 세우고 장판 깔고 도배해서 방 두 칸과 거실·부엌을 확보했다. 비닐하우스 한쪽에 간이 샤워시설과 재래식의 '푸세식' 화장실도 세웠다.

외환위기 직후 이곳 '꿀벌마을'에 들어왔던 사람은 홍씨 가족 등 80여 가구였다. 신용대란·글로벌금융위기 등을 거친 지금은 84세 노인부터 생후 2개월짜리 갓난아이까지 250여가구, 600여명이 비닐하우스 1동에 1~2가구씩 산다.

홍씨는 "처음엔 2~3년 살다 집 구해서 나가려 했지만 부부가 아무리 열심히 벌어도 돈 모으는 속도보다 집값 올라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고 했다. 홍씨의 비닐하우스에서 '좋았던 옛날'의 흔적은 구형 미제(美製) 냉장고와 수석(水石) 몇 점뿐이다.

◆높아지는 내집마련 연령

'사다리가 사라진다' 자문단인 박신영 토지주택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인구주택총조사의 20년치(1985~2005년) 자료를 추적한 결과, 40대 중반(45세 미만)까지 '내집에 사는' 사람은 점차 줄고(1985년 60.4%→2005년 53.8%), '셋집 사는' 사람은 늘었다(전세 20.1%→25%, 월세 16.2%→18.2%).

바꿔 말하면 젊은 세대로 갈수록 '내집 마련 연령'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일제 말기에 태어난 세대(1941~45년생)는 10명 중 6명(60.4%)이 45세 전에 집을 샀다. 이 수치는 해방 직후 태어난 세대(1946~50년생·53.8%), 초기 베이비붐 세대(1951~55년생·56.6%), 후기 베이비붐 세대(1956~60년생·54.4%), 초기 386세대(1961~65년생·53.8%)로 가면서 야금야금 줄어들었다.

주요 선진국은 자가(自家) 거주율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고, 내집이 없는 가정을 위한 공공 임대주택도 늘려가고 있다. 반면 한국의 자가 거주율은 1970년 71.7%에서 2005년 55.6%로 내려앉았다. 박 위원은 "집이 상당 부분 사회안전망 역할까지 하기 때문에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나 날린 사람은 질병·실직 같은 위기에 더 취약하다"고 했다. 주거비 부담이 저축과 재기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셋방살이 대물림

내집의 꿈이 멀어질수록 서민들은 필사적이 된다. 전주에 사는 박금자(가명·67)씨는 1989년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단독주택을 날렸다. 박씨는 사글셋방에 살면서 공사판 인근에 밥집을 열어 7년 만에 6000만원을 모았다. 그 돈으로 주택가 상가건물 1층에 식당(100㎡·30평)을 얻었다.

재기의 꿈은 2년 만에 물거품이 됐다. 건물주 사업이 망해 건물이 경매에 나온 것이다. 박씨는 보증금 6000만원을 날릴까봐 고민하다 사채와 은행빚 등 2억5000만원을 끌어다 건물을 낙찰받았다. "여기서 쫓겨나면 끝"이라는 절박감이 모험을 부추겼다.

그러나 예상 못한 복병이 있었다. 외환위기로 입주 상인들의 월세가 밀리고, 은행 이자가 연 18%까지 치솟았으나 건물 값은 뚝 떨어졌다. 기를 쓰고 장사해서 이자를 무는 사이 빚은 4억원 가까이 불어났다.

과천 비닐하우스에 사는 홍승순씨의 경우, 함께 사는 막내아들(32)이 대기업에 취직했지만 홍씨가 먼저 "집에 생활비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아들이 자리잡아 결혼하도록 보태줄 능력이 없으니, 스스로 벌어서라도 집을 얻어 결혼하라는 최후의 배려였다.

하지만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김은순(가명·70) 할머니에게는 홍씨처럼 안정된 직장을 구한 자식을 가진 것만도 부러운 일이다. 김 할머니는 박봉으로 평생 셋방살이를 면치 못했고 자식을 충분히 가르치지도 못했다. 할머니의 외동딸 정은주(가명·37)씨 역시 인천에서 사글셋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부모가 내집 마련을 못하면 자식도 셋방살이를 대물림하기 쉽다.

김 할머니의 딸 정씨는 가사 도우미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인천의 한 횟집에 취직해 월 110만원을 번다. 젊어서 이혼한 할머니는 셋집 주인에게 어린 딸을 맡기고 주스공장 생산직과 화장품 외판원으로 억척스레 일했다. 할머니는 "방값을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어 딸을 중학교밖에 못 보냈다"고 했다. 그게 두고두고 미안해 할머니는 3년 전 교통사고 보상금 300만원을 받아 딸의 사글셋방 보증금을 대줬다.

할머니 자신은 10년째 전세 800만원짜리 단칸방에 홀로 살고 있다. 할머니는 동네 공원과 상가를 돌며 파지를 줍고 불편한 몸으로 짬짬이 셋집 공동화장실을 청소한다. 집주인이 전세금 올려달라는 소리 안 하는 게 고마워 자진해서 하는 '노력 봉사'다. 전세금이 더 오르면 김 할머니는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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