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흔들리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나, 아직 어느 나라도 완벽한 사다리 복원의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일본에선 1990년대 들어 저성장·고령화·장기불황이 맞물리면서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중산층의 빈곤층 추락이 본격화됐다. 일본 정부는 저성장의 틀을 부수는 과감한 경제 개혁 대신 재정지출을 늘려 사회보장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고, 일본의 나랏빚은 눈덩이처럼 부풀어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결과가 됐다. 그럼에도 빈곤 탈출의 사다리는 여전히 복원되지 않는 '복지의 역설'을 겪고 있다.

일본 지바(千葉)의 한 고교가 입학금을 못 냈다는 이유로 신입생 2명의 입학식장 진입을 막았다. 오사카(大阪)의 한 구청은 보험료 미납을 이유로 초등학생 1명의 건강보험증을 박탈했다. 이런 냉정한 사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8년. "아이들한테 그럴 수 있느냐"는 동정론이 일면서 사회 문제로 확대됐다.

직업을 잃은 부모가 자녀 입학금과 건강보험료를 안 낸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일본에선 직업을 잃으면 실업수당이 나오고, 그마저 끊기면 최저생계비가 나온다. 그렇게 받은 돈을 자녀에게 돌렸으면 됐을 텐데, 부모들은 먼저 학비와 보험료를 끊었다.

이 아이들의 불행은 누구 탓인가? 직업을 잃었다고 자녀를 방치한 부모 탓인가? 불황을 이유로 일자리를 뺏은 기업 탓인가? 대책 없이 20년 장기불황을 만든 정부 탓인가?

2010년 해법이 나왔다. 일본 정부는 부모 탓에 보험 혜택을 못 받는 전국 어린이 3만명을 찾아내 전원에게 건강보험증을 발급했다. 고교도 전면 무상화(無償化)했다. 예산은 재원이 없어 국가 빚으로 충당할 방침이다.

언뜻 정부가 책임진 듯 보이지만 실상은 정부·기업·부모 누구도 책임진 것이 아니다. 정부는 '성장' 책임, 기업은 '고용' 책임, 부모는 '양육' 책임을 각각 회피했다. 대신 미래에 갚아야 할 나랏빚에 책임을 돌렸다. 복지가 통 크고 후할수록 일본 정부·기업·부모의 책임과 부담은 줄었다. 하지만 빚을 갚아야 할 미래 세대의 책임과 부담은 천문학적으로 늘었다. 일본식 '복지의 역설(逆說)'이다.

갈 곳 잃은 日비정규직 근로자들… 글로벌 경제위기가 시작된 2008년 말, 대량 해고로 직장과 거처를 잃은 일본의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일본 정부가 마련해준 강당에 모여 잠을 청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고용 사정은 회복되지 않아 이들 상당수는 노숙자로 전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빈부격차는 저성장과 고령화가 맞물린 1990년대 중반 이후 급속도로 확대됐다. 일본 정부는 분배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1990년 11조엔에서 작년 24조엔으로 증가한 사회보장 예산이 일본 정부의 적극성을 증명한다. 양적(量的) 측면에선 그렇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희망 없는 분배'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24조엔의 사회보장 예산 중 19조엔이 고령자의 빈곤화를 막기 위한 제도인 연금·의료·개호(介護·간호)보험에 투입됐다. 생계 곤란 가정을 지원하는 생활보호비는 2조엔. 미래 세대를 위한 복지예산인 보육원·아동수당·아동부양 수당은 모두 합쳐 8000억엔에 불과했다. 빚을 내서 충당한 분배의 과실이 대부분 노인 복지에 집중됐다는 뜻이다. 이런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2000년대 중반 고이즈미 정부가 추진한 후기고령자 의료제도 등 복지 개혁은 사회적 반발로 백지화됐다.

물론 일본의 후한 복지 정책은 극단적 계층 분화를 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재정 동원만으론 빈부격차가 확대되는 흐름을 돌리지 못했다.

빈곤층이 받는 생활보호(1946년 실시) 혜택을 4대째 대물림하는 세대도 다수 발생하고 있다. 한 번 가난이 증손자까지 대물림하는, 계층 고착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OECD는 일본의 빈곤율을 발표하면서 "비정규직이 급증한 것이 격차 확대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기업이 종신고용을 통해 평생 소득을 보장함으로써 '1억 중류' 신화를 자랑하던 나라다. 그런 일본에서 비정규직은 이미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을 넘어섰다.

제도적으론 고이즈미 정부가 노동법 개정을 통해 제조업 파견 근로(비정규직)를 사실상 전면 허용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경쟁력이 약화된 일본 제조업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측면이 있었다.

노무라증권 니시자와 다카시(西澤隆)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당시 정부가 비정규직을 통해 제조업의 숨통을 터주지 않았다면 제조업 약화로 실업자가 늘어나 격차는 더 벌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을 통한 일본식 가난 구제는 드디어 한계를 맞았다. 20년 만이다. 저성장으로 인해 정부 세금 수입은 1990년 60조엔에서 작년 46조엔으로 줄었다. 재원이 없으니 정부가 새로 발행하는 국채 신규발행액이 올해 세금 수입을 넘어설 전망이다. 들어오는 월급보다 새로 꾸는 빚이 더 많은 전대미문의 기형적 가계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앙정부의 빚은 882조엔(2010년 3월 말)으로 늘었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200%를 넘나든다. 세계 최악이다. 그럼에도 그리스처럼 파산 지경에 이르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1400조엔을 넘는 국민 저축이 국채를 흡수해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축을 깨서 사는 고령 세대가 늘어나면서 국민 저축 역시 조만간 절대액이 줄어들 전망이다.

코너에 몰린 일본 정부는 급기야 세금 인상 카드를 들고 나왔다. 5%인 소비세를 국제 수준인 10% 정도로 인상해 매년 세금 2조5000억엔을 더 걷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증세가 실현된다고 해도 지금 일본 정부가 새로 추진하는 노인을 위한 복지정책(최저연금보장제)에 사용하면 바로 고갈된다. 그 이후의 시나리오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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