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6·25 한강다리 폭파의 희생자들

    입력 : 2010.06.29 23:29

    1950년 6월 28일 새벽 서울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을 뚫고 시민들은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 인도교로 끝없이 몰려들었다. 북한군 탱크는 남침 이틀 만에 미아리 저지선을 넘었다. '서울 사수(死守)'를 약속했던 대통령과 정부는 27일 새벽 남행 열차를 탔다. 당시 인도교는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단 하나의 철교였다.

    ▶4000여명의 사람과 차량이 뒤엉켜 한 발짝 떼기도 힘들던 2시 30분 무렵, 천지를 흔드는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인도교가 두 동강 나고 그 위에 있던 사람과 차들이 산산이 흩어지며 시커먼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북한군의 추격을 끊겠다며 우리 군이 TNT 3600파운드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정부도 군도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 살겠다는 일념으로 다리를 건너던 양민 500~800명이 까닭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인도교 폭파를 지시한 것은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임진강과 예성강 다리를 폭파하지 않아 북한군 진격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고 믿던 그는 "폭파에 실패하면 총살"이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전날 폭파 시기를 놓고 참모들이 격론을 벌일 때 그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고 한다(이창록 '한강 인도교 폭파의 내막'). 북한군이 삼각지에 나타난 것은 인도교 폭파 후 6시간이 지나서였다. 급박한 순간이었다 해도 군 수뇌부가 시민의 생명을 구하는 문제에 조금만 더 생각이 미치고 다리 위 상황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더라면 그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 탓만 할 수도 없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다는 많은 위정자의 당시 처신과 판단이 그랬다. 북한군의 예고된 남침에 대해선 속수무책이었고, 북한군이 짧은 시간 서울로 밀고 들어오자 혼비백산했고, 적의 총부리 앞에 노출된 힘없는 국민의 안전에 대해선 나 몰라라 했다.

    ▶그제 한강 노들섬에서 인도교 폭파 때 숨진 영령들을 달래는 진혼제가 60년 만에 열렸다. 나라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날벼락같은 죽음을 당했으니 그들의 넋은 죽어서도 하늘을 떠돌았을 것이다. 그나마 행사를 주최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유엔한국참전국협회라는 민간단체다. 정부는 이제라도 억울한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노들섬에 위령탑이라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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