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3] 전쟁을 부추기고 이용한 모택동

  • 오규열 서울디지털대 교수·중국정치

    입력 : 2010.06.23 02:53 | 수정 : 2010.06.23 08:39

    國共내전때 北韓 도움 받은 모택동
    "만주에 우리 있으니 걱정마라" 남침 1년前 김일성에 派兵 약속
    "60개사단 규모 무기 지원을" 모택동, 스탈린에 요청… 속셈은 낙후된 중공軍 현대화
    모택동의 의도 알아챈 스탈린 "16개 사단 규모만 지원"

    모택동이 6·25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1950년 10월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당시 중국은 경제 재건 등 내부적으로 시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이를 뒤로하고 6·25전쟁에 참여했다. 모택동이 자기 발등의 불도 아닌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든 것은 무엇보다 세계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을 지원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도 대만을 감싸고 도는 미국과 싸우지 않고는 다른 지역의 사회주의 혁명은 고사하고 중국 혁명도 지켜내지 못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내전 당시 북한의 도움을 받은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참전 결정의 이유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했을 때 만주지역은 무주공산이었고, 이 공백을 소련군이 메웠다. 모택동은 소련의 묵인하에 11월까지 당·정 간부 2만여명, 공산군 10만명을 만주로 진출시켰다. 하지만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공산군은 국민당 군(軍)에 비해 열세였다. 이때 만주 지역 거주 전체 조선인의 5%에 달하는 6만3000여명이 공산군 일원으로 모택동을 지원했다.

    모택동이 1951년 1월 19일 팽덕회가 작성한 보고서에 가필한 메모. 중공·북한군의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1946년 후반, 국공내전이 본격화되면서 국민당 군이 심양(瀋陽)과 장춘(長春) 등 동북지역 대도시를 점령하자 공산군의 보급로는 차단됐다. 그러자 김일성은 북한의 북부지방을 공산군의 보급로로 열어주었고 공산군의 전열이 정비될 때까지 이 지역을 후방기지로 내주었다. 1947년 공산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최대한 물적 지원을 하였다. 모택동은 김일성의 도움을 받아 동북지방의 승리를 발판으로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중국혁명이 완수되면 북한을 도울 것이며 필요하다면 병력을 제공할 의사가 있다고 여러 차례 표명했다. 1949년 5월 북경을 방문한 김일(빨치산 출신으로 훗날 북한 부주석에 오른 김일성 측근)에게 모택동은 말했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언제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니 북한은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만 만주에 중국군이 있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해 7~8월 모택동은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하기 위해 중공군 내 조선인 사단 2개를 북한에 넘겨줬다. 모택동은 다만 개전 시점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의 막바지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남침 결행 한 달여 전인 1950년 5월 중순, 북경의 모택동을 찾았다. 모택동은 "만약 미군이 전투행동에 참가한다면 중국은 북조선에 군대를 보내겠다. 소련은 미국과 38선에 대해 합의하였기 때문에 참전이 적절치 않지만 중국은 그런 약속과 관계없기 때문에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했다. 김일성의 남침 개시에 앞서 중공군의 파병 가능성을 다시 확인해준 것이다.

    6·25전쟁 초기 미국이 7함대를 대만해협에 배치한 것도 모택동을 자극했다. 미국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함대를 배치했지만, 중국은 거꾸로 미국이 중국 본토에 침입할 것을 두려워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과 한국군이 38선을 향해 진격하자 모택동은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1950년 10월 1일 스탈린의 중공군 파견 요청을 받은 모택동은 10월 5일 정치국 회의에서 일부 반대 의견을 누르고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미국에 대항하는 조선을 도와서 사회주의 대가정과 국가를 보위한다]'의 명분을 내세워 출병을 결정했다. 하지만 형식은 중국 정부나 공산당 군대가 아니라 의용군인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支援軍)'이었고, 사령관은 팽덕회(彭德懷)였다.

    모택동이 6·25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온 중공군 병사들을 환영하고 있다.
    모택동은 10월 8일 소련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주은래(周恩來)를 모스크바로 파견했다. 주은래는 소련에 공군 지원과 무기·장비, 그리고 육군 경무기의 설계도 지원을 요청했다. 중국은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하는 기회를 이용해 낙후된 중공군을 소련의 현대화된 무기와 장비로 무장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스탈린은 무기·장비와 제조 기술 제공에는 동의했으나 공군 지원은 2개월 내지 2개월 반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이 곤란하다면 출병하지 않아도 된다. 북조선이 없어지더라도 우리는 역시 사회주의이며 중국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를 듣고 10월 12일 조선 출병을 잠정 중단시켰던 모택동은 결국 참전을 결정했고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10월 19일 출병 결정문을 하달했다. 중공군은 10월 25일 국군1사단과 첫 전투를 시작으로 11월 5일까지 1차 공세를 취했다.

    중국이 6·25전쟁에 개입한 얼마 뒤 모택동은 큰아들 모안영(毛岸英)을 전선에서 잃었다. 모택동과 두번째 부인 양개혜(楊開慧) 사이에서 태어난 모안영은 평안도의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번역과 비서 일을 하다가 11월 25일 미군기 폭격으로 죽었다. 2003년 나온 중국공산당의 공식 '모택동전'은 주은래가 모안영의 사망 소식을 한달이 넘게 지난 1951년 1월 2일 모택동에게 알렸다고 전한다. 모택동은 비통에 잠긴 채, "전쟁은 끝내 목숨을 요구하는구나"하고 탄식했다. 모안영은 북한 땅에 묻혔고, 지금도 북한을 찾는 중국 고위급 인사들은 모안영의 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6·25전쟁 참전을 중공군 현대화의 기회로 삼으려는 모택동의 의지는 소련과의 불화로 이어졌다. 중공군의 1차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끈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36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를 요청했다. 이때까지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 병력은 30개 사단이었다. 모택동은 이어 전쟁의 장기화를 명분삼아 10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3교대 순환제 전략을 수립하고 스탈린에게 60개 사단 규모의 무기 공급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것이 순수 전쟁용이 아니라 중공군 현대화에 이용하려는 의도임을 간파했다. 스탈린은 1951년 16개 사단 규모의 장비만을 공급하고, 소련이 중국에 제공한 각종 대공화기는 북한에 넘겨주라고 지시했다.

    무기 공급을 둘러싸고 불거진 중·소 갈등은 휴전협상에서 더욱 증폭됐다. 조기휴전을 원했던 모택동은 1951년 8월 13일 유엔군이 제시한 현 전선에서의 휴전안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던 스탈린은 강력하게 지속적인 전쟁을 요구하였다. 결국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뒤 미국 등 유엔군과 중국·북한 사이의 휴전협상은 급진전됐고, 그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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