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9]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체(genome)

  •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입력 : 2010.05.17 22:59

    나는 요사이 엄청난 대박의 기회를 놓친 아쉬움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명색이 과학을 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몇 년 전부터 얼개를 잡아 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끄적거려온 소설이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이 밀리언셀러가 될 것이며, 곧이어 할리우드의 밀리언달러 제의가 들어오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내가 생각하는 거의 완벽한 미남인 덴절 워싱턴을 주연배우로 낙점까지 해두었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인간유전체 프로젝트'의 성공과 더불어 생물종의 유전자 전부를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유전체학(genomics)이 21세기 생명과학의 총아로 떠오르는 가운데 어느 유전학자가 자신을 포함한 일군의 사람들에서 특이한 유전체 변이를 발견하고 그 원인과 경로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그 변이 유전자들이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밝혀내지만, 학계의 비판이 거세 고전하던 어느 날 이른바 네안데르탈인의 후손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하려는 인종청소 계획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행히 어느 용감한 신문기자의 도움으로 엄청난 음모의 전모를 파헤친다는 얘기이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연상되지 않는가?

    그런데 최근 이런 내 상상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지난 5월 7일자 세계적인 과학저널 사이언스(Science)에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체를 분석해보니 그들과 우리가 생식적으로 격리된 별개의 종들이 아니라 중동과 유럽에 걸쳐 수천 년 동안 함께 자식을 낳고 살았을 것이라는 논문이 게재되었다. 게다가 유럽과 아시아 민족들보다 아프리카인들이 네안데르탈 유전자를 훨씬 더 적게 갖고 있는 걸로 나타났다. 이는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중동 지역으로 이주했을 때 먼저 그곳에 정착한 네안데르탈인과 함께 살며 자식을 낳았고 그들이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나갔음을 의미한다.

    이 논문을 읽으며 내겐 아쉬움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공상과학소설이란 본래 설마 벌어지랴 싶었던 게 훗날 과학으로 입증되어야 매력적인 법인데 게으름을 피우다 그만 시기를 놓쳐 못내 아쉽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의 후손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덴절 워싱턴을 잘못 캐스팅하는 실수를 모면하게 된 건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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