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법까지 어기며 국경 넘어 求法 여행… 허구 걷어낸 '진짜 서유기' 만나다

    입력 : 2010.05.15 03:06

    현장 서유기
    첸원중 지음|임홍빈 옮김|에버리치홀딩스
    668쪽|3만5000원

    인도에서 논쟁 즐기고 바미안 대불 묘사하고…
    1400년 前 현장법사 모험, 이야기체로 쉽게 풀어내

    배낭을 짊어지고 서역 여행을 하는 현장 스님을 그린 그림. 머리 위에는 햇빛 가리개 차양을 달았고, 그 앞에 향로를 늘어뜨렸다. /에버리치홀딩스 제공
    중국 관영 중앙TV방송국(CCTV)의 교양프로그램 '백가강단'(百家講壇)은 위단(于丹) 베이징사범대 교수, 이중톈(易中天) 샤먼대 교수 등 인문학 스타들을 배출한 산실이다.

    논어와 삼국지 등 중국고전을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현대적으로 풀어낸 TV 강좌는 13억 중국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냈다. 위단의 '논어심득(心得)', 이중톈의 '초한지강의(講義)' 등은 수백만부씩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국내에도 번역·소개됐다.

    첸원중(錢文忠·44) 상하이 푸단(復旦)대 교수의 '현장 서유기'(玄�� 西遊記) 역시 '백가강단'을 통해 2007년 방송된 강좌(36회)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당나라 초기인 7세기에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해 국법(國法)까지 어기며 사막과 설산(雪山)을 넘어 인도에서 수학하고 많은 불경을 가져와 번역한 현장 법사의 모험담을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 등의 역사기록을 토대로 풀어냈다.

    명나라 말기인 1590년대 오승은이 쓴 소설 '서유기'는 현장 법사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작품이다. 하지만 '서유기'는 현장이 1400년 전 당나라 때의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대부분 허구이기 때문에 현장의 서역(西域) 여행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독일 하노버대학에서 인도학을 전공했고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구사하는 첸 교수는 먼저 소설 '서유기'의 허구를 걷어내고,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는 데 노력한다. 현장 스님의 출신과 구법(求法) 여행을 떠나는 과정을 밝히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서유기'는 현장이 당 태종 때인 639년에 고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음모에 휘말린 탓에 어릴 적에 승려가 됐다고 소개하지만, 첸 교수는 현장이 수 문제 때인 600년에 태어났다고 설명한다.(현장의 출생연도는 몇 가지 이설이 있으나, 입적 시기는 664년으로 대부분 일치한다.) 소설에선 현장이 당 태종의 칙명을 받들어 서역으로 떠나지만, 실제로는 출국 허가를 받지 못해 627년 몰래 장안을 단신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현장은 국경을 넘다가 수비대에 체포돼 국법을 어긴 죄로 장안으로 소환되거나 즉결처분당할 위험까지 겪었다.

    고창(高昌)왕국(투르판), 쿠차와 쉬엽성(키르기스스탄 토크막), 탈라스(카자흐스탄 잠불) 삽말건국(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바미안 국(아프가니스탄 바미안), 마가다국 날란다 사원(인도)…. 현장이 귀국 후 당 태종의 명령을 받고 지은 '대당서역기'엔 그가 직접 체험했거나 이야기를 전해 들은 139개국에 관한 정보를 상세하고 정확하게 담고 있다. 고대 역사 기록이 많지 않은 인도와 중앙아시아 역사를 연구할 때 귀중한 1차 사료가 되는 셈이다.

    '왕성 동북쪽 산 아래 부처님의 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40~150척으로, 금빛에 눈이 부시고 보석장식이 찬란하다… 가람 동쪽에는 구리로 주조한 석가모니불의 입상이 서 있는데, 높이가 100여척이다.' 현장이 기록한 바미안 대불의 모습이다. '(인도에는) 그 땅에 배와 복숭아가 없었는데, 인질이 (처음) 씨를 심고 재배했기 때문에 복숭아를 '지나니'(支那�R·중국에서 가져왔다는 뜻), 배를 '지나(支那)라자부달라'('중국왕자'라는 뜻)라고 일컫는다.' 오늘날의 카불에 있던 카피시국(國)의 사찰 '질자(質子)가람'의 내력을 소개한 뒤 적은 기록이다. '질자'는 인질이라는 뜻으로, 한나라 천자의 아들이 사찰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썼다. 질자가람의 또 다른 이름은 '샤라가'(沙落迦)로, 중국의 낙양(洛陽)을 그 지역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배와 복숭아의 명칭에 이어 고대중국과 서역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현장의 기록에는 인도인의 위생청결을 강조하는 대목도 있다. '밤을 지낸 밥과 반찬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밥을 먹고 나서는 버드나무 가지를 씹어서 이빨을 청소한다'는 대목이다. 돈황 벽화에는 실제로 버드나무 가지를 씹는 형상이 남아있다고 한다.

    첸 교수는 현장이 논쟁을 즐겼고, 토론에 능했다고 소개한다. 현장은 인도로 가는 도중뿐 아니라 5년간 수학한 마가다국 날란다 사원에서도 공개토론에 자주 나섰다. 주로 소승불교나 이단 종파와의 격론이었다. 쿠차의 고승 무크차 굽타와의 토론이 예선전이었다면, 인도의 유력 지배자 게일왕(王)이 고승대덕을 모아놓고, 곡녀성(曲女城·카나우지)에서 개최한 경전토론은 결승전이었다. 2000명 가까이 참여한 이 대회에서 현장은 '질 경우, 목을 베어 사죄할 것'이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나서 승자가 됐다. 그는 이 토론을 계기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양쪽에서 각각 '마하야나데바'(대승천·大乘天), '모크차 데바'(해탈천·解脫天)라는 최고 존칭을 받음으로써 불교계를 평정했다. 현장은 645년 인도에서 귀국한 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비롯한 불교 경전 1300여권을 번역하거나 번역을 주재함으로써 동아시아 불교의 이론적 자산을 획기적으로 넓혔다.

    '현장 서유기'의 미덕은 '대당서역기'와 현장의 행적을 이야기체로 쉽게 풀어낸 점이다. 하지만 고대의 서역 여행가로 현장과 함께 5세기의 법현(法顯), 15세기의 마환(馬歡)을 거론하면서도 현장 스님의 100년 뒤에 인도를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승 혜초(慧超)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한 것은 중국인 대상 강좌라는 측면이 작용한 것 같다.

    현장의 구법 여행을 담은 '대당서역기'는 19세기 이래 수많은 서구인들의 동경심을 자극했다. 뉴욕타임스 베이징지국장을 지낸 리처드 번스타인(Bernstein)도 그 중의 하나였다. 불교 신자가 아니었던 유대인 번스타인은 쉰다섯 중년에 현장의 여정을 뒤밟을 생각을 했다. 시안(西安)부터 자동차·기차·비행기를 바꿔 타며 현장의 행로를 답사한 번스타인의 여행기(2001년 출간, 원제 'Ultimate Journey', 우리말 번역서 제목은 '대당서역기')도 함께 읽으면 좀 더 실감 나는 독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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