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뷔통의 수석 디자이너인 마크 제이콥스가 최근 "패션쇼에 할리우드 스타가 오는 걸 원치 않는다. 그들이 맨 앞줄에 앉는 걸 금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왜 유행 보증수표인 연예인을 거부했을까?
그는 "(이들 중 앞줄에 앉아) 쇼를 제대로 보는 사람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마크 제이콥스의 발언은 요즘 해외 패션계에 일고 있는 '안티패션(anti-fashion)'과 무관하지 않다.
안티패션은 반(反) 패션, 즉 '주류를 거스르는 패션'을 뜻한다. 1980년대 요지 야마모토·꼼 데 가르송은 '거적때기 같은 옷'을 디자인해 충격을 안겼다.
■할아버지·할머니 안에 진짜 패션이 숨어 있다
홍석우(27)는 여러 브랜드를 파는 편집매장 바이어, 패션칼럼니스트를 거쳐 현재 여자 아이돌 그룹 옷을 입히고 있다. '아이돌'이 입으면 바로 유행이 되는 만큼 안티패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사정은 그렇지 않다.
"올해 아이돌 그룹 스타일링을 맡으면서 '소녀시대처럼 마냥 예쁘게 입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렇다고 내 견해만 일방적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
그의 주관은 자기 패션 블로그에 담겨 있다. 홍석우는 2006년 10월부터 노인 사진을 찍어왔다. 신설동·종로 탑골공원·동묘 앞 벼룩시장·행당동 주변을 돌다 멋쟁이 노인을 발견하면 카메라를 꺼내 뒷모습을 도촬(盜撮)했다.
"패션사진 찍는 사람이라고 하면 젊은이들은 대부분 흔쾌히 촬영에 응했다. 할아버지·할머니는 '뭣 하러 찍느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저작권 안 걸리는 뒷모습을 찍었는데 독특한 자료가 됐다."
홍석우는 "젊은이들이 옷을 화려하게 입는다지만 내 눈엔 그렇지 않다. 요즘 무슨 공식처럼 스키니진을 입는다. 둘러보면 옷을 사랑하는 노인이 생각보다 많다. 이들에겐 자유롭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가 있다"고 했다. 그 예를 보자.
#1. 2008년 5월 25일 신설동. 갈색 털 든 검정 고무신에 검정 양말, 검정 칠부 바지에 검정 모자 쓴 할머니가 길을 걷고 있다. 이 사진을 본 해외 패션 블로거가 말했다. "과거의 '알렉산더 왕(Wang·뉴욕에서 활동하는 중국계 디자이너)'이나 '꼼 데 가르송'을 떠올리게 한다."
#2. 같은 해 5월 10일 신설동. 갈색 줄무늬 바지에 뿔테 안경, 백(白)구두, 흰 조끼, 흰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장을 보고 있다. 반응은 이랬다. "만화 캐릭터가 걷는 것 같다. 멋지고 겸손한 모습에 경의를 표한다."
#3. 같은 해 5월 7일 압구정동. 감색 재킷에 회색 바지, 갈색 베레모를 쓴 백발 할아버지가 천가방을 어깨에 메고 서 있다. 파리의 패션 브랜드 관계자는 이 사진을 보고 홍석우에게 "네 사진은 새롭고 진취적이다. 우리 웹사이트에 패션 관련 글을 써달라"고 제안했다.
■온통 브랜드로 치장하는 건 싫다
'열두폭 병풍 레코드'를 운영하며 음반 작업·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이아립(여·36)은 어릴 적부터 특이한 옷을 입었다. "병풍 만들던 할머니가 초등학교 때까지 모든 옷을 만들어 입혔다. 할머니는 감색 꽃무늬 원피스를 만들면 머리띠·벨트·가방·양말·속옷까지 전부 세트로 만들어줬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미니멀한 디자인이 좋았다".
1980년대 말 여중생들 사이에서 닭볏 같은 앞머리가 유행했다. 이아립은 혼자 티셔츠 두 장을 겹쳐 입고 다녔다. 1999년 그룹 '스웨터' 보컬로 나섰을 땐 대부분의 옷을 동대문시장에서 원단을 떼와 만들었다.
"그때는 내가 입고 싶은 옷을 파는 데가 없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모든 종류의 옷을 팔기 때문에 만들 필요까진 없다."
이아립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산 얼룩덜룩한 배기 바지에 엉덩이를 덮는 카디건, 민소매 셔츠, 스카프 3개, 검정 재킷을 마구 겹쳐 입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거적 같은 윗도리, 배기 바지, 점프 수트 등 봉제선이 특이한 옷들을 애용했다.
"요즘은 이런 형식의 옷을 많이 입더라. 나는 남이 뭘 입든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로고가 큼직하게 박혀 있거나 브랜드가 드러나는 옷은 싫어한다. 나보다 값어치 나가는 옷으로 날 꾸미는 건 싫다."
그에게 안티패션을 물었다. "패션계에서 또 다른 화젯거리로 만들어 낸 것 같은데…. 요즘 말하는 '안티패션'이 내 생각과 비슷하다면 신기하다. 하지만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아이디어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