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들어 시작된 '광우병 촛불집회'는 5월 9일을 기점으로 전국 규모로 확산되면서 3개월 가까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그 후 2년, 광우병 공포는 현실화되지 않았고, 미국 수입쇠고기는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공포를 선동했던 그때 그 '촛불 주역'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촛불시위가 확산되던 2008년 5월 중순. 전창열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25·동물생명공학과 4년·사진)은 단과대 학생회장단으로 구성된 총운영위원회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운동권 계열의 단과대 회장들은 서울대가 촛불시위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비운동권 계열인 전창열씨는 "학내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서울대 이름을 걸고 시위에 나가려면 학생 총투표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그러는 사이 학내외 여론은 악화됐다. 좌파 계열의 한 인터넷 매체는 "10대들은 촛불을 들었는데 서울대생들은 축제에서 원더걸스 보려다 아수라장이 됐다"고 비꼬았다. 학내 게시판인 스누라이프(snulife)에도 총학생회를 비난하는 글들이 쇄도했다.
결국 총학생회와 총운위는 '쇠고기 재협상 촉구를 위한 동맹휴업'에 대한 학내 투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인터넷의 뜨거운 열기와 달리, 5월 28일 시작된 투표 참여율은 예상 외로 저조했다. 자칫 정족수 미달로 무산될 뻔한 상황에서 돌발사건이 발생했다. 6월 1일 새벽, 촛불시위에 참여한 서울대 여학생이 전경에 짓밟히는 동영상이 공개된 것이다. 이 사건이 학생들 분노에 불을 지펴 총투표는 6월 5일 51%의 투표율과 89%의 찬성률로 가결됐다. 서울대는 이날 쇠고기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전씨는 학우들과 함께 여덟 차례 촛불시위에 참여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지난 4일, 광화문에서 만난 전씨는 뜻밖의 말을 했다. 현재 공익근무요원으로 휴학 중인 그는 "학교에서 배운 동물생명공학 전공 지식과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미국산 쇠고기가 국민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과장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또 "선거를 통해 권한을 위임받은 정부가 협상을 타결시킨 자체는 문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모든 행정 행위를 일일이 국민에게 물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다만 국민의 권익을 최우선해야 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폭력이 난무하는 시위 현장을 보며 "정치가 안정되지 않으면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구나"하는 걱정도 들었다고 했다.
―소신이 그랬다면, 왜 동맹휴업을 하고 시위에 참여했나.
“학생들이 총투표라는 정당한 절차를 통해 그렇게 결정한 것이니까. 일단 동맹휴업을 하기로 결론이 난 이상 학생의 대표인 총학생회장이 빠질 수는 없었다.”
―공포에 떨던 주위 사람들에게 ‘걱정할 필요 없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그냥 ‘냉정하게 판단하라’고만 했다.”
고무된 광우병대책회의는 ‘재협상하지 않을 경우 정권퇴진을 위한 국민항쟁을 하겠다’며 시위 이슈를 공기업 민영화 반대 등‘5대 의제’로 확대하겠다며 정치투쟁을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 총학생회는 또 한 번 중요한 뉴스가 됐다. “학생들이 총투표에서 의결한 것은 쇠고기 재협상에 국한된 것인 만큼 정치 이슈를 다루는 촛불집회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비판이 쏟아졌으나 총학생회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전씨는 촛불시위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앞으로 더 잘하고 겸손해지라는 질책의 뜻으로 촛불을 들었다고 봅니다. 국민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임기 초부터 정말로 물러나길 원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겁니다.”
그는 또 “혼란스러운 와중에 서울대 총학생회가 학생들과의 약속과 절차적 정당성을 지켰다는 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촛불시위의 취지가 자기 소신과 어긋나는 것이라면, 그 시위에 참여해 ‘정권 퇴진’ 구호를 외친 것은 과하지 않았을까. 마지막 질문을 던지자 침묵 끝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사회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라 한쪽으로 몰려가는 상황에서 다른 의견을 피력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어요. 정권퇴진을 외친 것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호된 질책의 표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