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기증 코디네이터가 전하는 '뇌사자 24시'

    입력 : 2010.05.06 03:01

    3차례 조사뒤 腦死판정… 환자 3명에 '새 생명' 기증
    "오랜시간 병상에서 고생…
    마지막 하루 이틀은 최고의 예의 다해 모셔"

    "13시 10분, 사망하셨습니다."

    4일 오후, 윤희선(가명)씨는 46년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사고로 37일 전 서울 송파구 A병원에 입원한 뒤 한 번도 눈을 떼지 못했고, 제 힘으로 호흡하지도 못했다. 뇌사(腦死) 추정 상태를 이어오다 이날 최종적인 뇌사 판정을 받은 것이다.

    윤씨의 남편과 자녀들은 전날 윤씨의 장기(臟器)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병원측에 밝혔다. 며칠을 고민하다 내린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날 저녁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에서는 3명의 환자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윤씨가 남기고 간 간(肝)과 신장(腎臟) 2개가 3명의 환자에게 이식돼 새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뇌사판정까지 24시간

    3일 오후 12시 34분. 윤씨를 싣고 A병원을 출발한 구급차가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도착했다. 최소 24시간 동안 윤씨의 뇌사판정·장기이식 절차를 돕게 될 장기구득(臟器求得) 코디네이터 정유진(30) 간호사가 윤씨를 맞았다. 정 간호사는 A병원의 코디네이터로부터 윤씨의 상태와 그간 치료상황에 대해 전달받고 숙지해놓은 상태였다. 윤씨는 이날 오후 2시 50분부터 4일 오전 10시 무렵까지 3단계에 걸친 뇌사판정 조사를 받았다. ▲외부자극에 반응하는지를 보는 7가지 검사(뇌관반사 검사)와 ▲인공호흡기를 뗐을 때 스스로 호흡하는지 여부를 보는 무호흡 검사로 이뤄진 뇌사 조사가 6시간 간격으로 2번 진행됐다. 1·2차 조사에서 모두 뇌사가 합당하다는 결과가 나와 윤씨는 4일 오전 3차 관문인 뇌파 검사를 받았다.

    병상 주변에는 주치의(내과)와 신경외과·마취과·신경과 전문의들이 오갔다. 정 간호사는 내내 윤씨의 곁에서 검사를 돕고 혈압·맥박·산소포화도 등 활력 징후를 체크했다. 윤씨의 몸이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도 정 간호사의 임무다. 매 관문을 넘을 때마다 보호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4일 오후 1시 의료인과 종교인 등 5명으로 구성된 뇌사판정위원회가 열렸다. 위원회는 윤씨의 사망 원인, 보호자의 장기기증 동의 과정에 대한 검토를 거쳐 1시 10분에 뇌사 최종판정을 내렸다. 오후 4시, 윤씨는 수술대에 올랐다. 적출된 간과 신장은 옆 수술실에 대기하던 환자 2명과 아산병원의 환자 1명에게 곧바로 이식됐다. 오후 8시쯤 정 간호사는 윤씨의 시신을 정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속으로 되뇌며, 윤씨의 시신이 수술 전의 깨끗한 모습으로 장례식장에 옮겨질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예를 다했다.

    ◆뇌사자 1명이 9명에게 새 생명 준다

    윤희선씨는 지난 3월부터 본격 활동을 시작한 복지부 산하 한국장기기증원(KODA)이 찾아낸 49번째 뇌사 장기기증자이고, 정유진 간호사가 맡은 12번째 환자다.

    약 30시간을 중환자실에서 보낸 뒤 눈이 퀭해진 정 간호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 시간 병상에서 고생한 환자들의 마지막 하루 이틀은 최고의 예를 다해서 모시려고 해요. 보호자들이 굉장히 어렵고 장한 결정을 하신 건데, 마음으로라도 위로가 되어야죠."

    3일 오후,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윤희선씨의 1차 뇌사조사가 진행 중이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정유진 코디네이터(맨 왼쪽)의 표정이 진지하다. 윤씨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신체 일부는 새로운 생명으로 이 세상에 남았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한국장기기증원에는 소정의 교육과정을 거친 정 간호사 같은 장기구득 코디네이터 14명이 있다. 이들은 올 3월 이후 약 50명의 뇌사기증자를 찾아냈다. 이들은 병원을 돌아다니며 잠재 뇌사추정자를 평가하고, 장기구득을 설득하며 장기기증 전 과정에서 의학적 관리 업무를 담당한다.

    지난해 김수환 추기경 선종(善終) 이후 장기기증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증폭됐다. 사후에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한 희망자 수는 2008년 7만4841명에서 작년 18만5046명으로 2.4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당장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대기자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소식이다. 대한이식학회 김순일 장기기증활성화위원장(연세대 의대 교수)은 "장기이식 희망자가 늘어난 것은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이지만, 당장 이식이 활성화되려면 뇌사 장기기증자가 늘어야 한다"며 "뇌사추정자를 관리하면 연간 1000~1500명의 기증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뇌사자 1명이 최대 9명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있다.

    지난해 국내 뇌사 장기기증자 수는 261명으로 2008년(256명)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우리나라의 뇌사자 장기기증은 인구 100만명당 5명으로 스페인(35명), 미국(25명), 프랑스(22명)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순서를 기다리는 이식대기자는 갈수록 적체돼 2000년 5343명에서 2010년 1만7656명으로 늘었고, 평균 3.1년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지난 4월 국회를 통과한 장기이식법 개정안에는 한국장기기증원의 설립 근거와 함께 ▲뇌사 판정 절차 간소화 ▲뇌사추정자 신고 의무제가 담겨 뇌사자 장기기증에 청신호가 켜졌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김선희 한국장기기증원 사무총장은 "아직 국민 대다수가 장기기증을 불경(不敬)한 것으로 생각하고, 뇌사 장기기증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며 "의료진들도 보호자에게 장기기증을 권유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뇌사 기증자에 대한 예우도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외국처럼 장기기증자를 위한 '추모의 공간'을 만드는 방안을 제시했다. 시민들이 자주 찾는 놀이공원 등에 뇌사 기증자들의 기념공원을 만들어 장기기증의 의미를 되새기고 예우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테스트(Test)는 '나는 영원히 살고 싶다'는 시를 남겼다. "언젠가는 나의 주치의가 나의 뇌 기능이 정지했다고 단정할 때가 올 것입니다… 나의 몸을 산 형제를 돕기 위한 충만한 생명으로 만들어주십시오." 테스트는 눈과 심장, 피, 신장, 뼈와 근육과 섬유와 신경, 뇌세포까지 아낌없이 나눠주라고 썼다.

    이 시는 "내가 부탁한 이 모든 것을 지켜준다면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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