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여고 1학년 11반은 '구두닦이반'

    입력 : 2010.05.04 03:06

    선생님들 구두 닦아 모은 돈, 연말 홀트아동복지회에 기부… 점심시간 활용 17년째 이어져

    3일 오후 1시 서울 내발산동의 덕원여고 1학년 11반 교실. 점심을 후딱 해치운 학생들이 교실 뒤편의 회색 사물함에서 성인 남성 구두 10여 켤레를 꺼냈다. 오전 쉬는 시간에 미리 수거해놓은 이 학교 교사들 구두였다. '구두닦이함'이라 써붙여진 청록색 플라스틱 상자에서는 구멍 뚫린 살색 스타킹과 비닐장갑, 솔, 검은색 구두약, 갈색 구두약 등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교장쌤 구두 여기 있어." 각자 닦아야 할 구두를 찾는 학생들 틈에서 김유경(17)양이 친구가 건네준 검은색 구두를 받았다. 유경이는 교장선생님 구두에 검정 구두약을 얇게 바르고 살짝 물을 묻힌 뒤 스타킹을 양손에 감아쥐고는 능숙한 솜씨로 구두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15분 정도 '물광'을 내니 앞코가 반질반질 윤이 났다.

    "휴~ 다됐다. 이만하면 됐지?" 유경이는 옆에서 열심히 광을 내고 있는 친구들에게 구두를 들어 보이고는 구두를 한손에 쥐고 교장실로 총총 뛰어갔다. 교장 선생님 자리에 얌전히 놓아두는 것까지 '풀서비스'한다.

    “학기 초에 집에서 부모님 구두를 닦으며 연습도 했어요.”덕원여고 1학년 11반 학생들이 3일 점심 시간에 교사들 구두를 닦고있다. 이 반은 점심시간이면 반찬 냄새가 아니라 구두약 냄새가 나는‘구두닦이반’이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구두닦이반'으로 불리는 덕원여고 1학년 11반에선 매일 점심시간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1학년 11반으로 배정되는 신입생들이 1년간 선생님들 구두를 닦아 모은 돈을 연말에 홀트아동복지회에 기부하는 전통을 17년째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1학년 11반과 홀트의 인연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가 문을 열고 첫 입학생을 받은 그 해, 가정 담당 교사가 각 반을 돌아다니며 홀트아동복지회와 남을 돕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때 마음이 동한 '1기' 1학년 11반이 각자 200~300원씩 갹출해 매달 1만원씩 홀트에 기부했고, 이 전통이 매년 반복돼 올해로 꼭 30년째다.

    1993년 당시 1학년 11반 담임을 맡았던 정우훈(55·한문)교사는 재미있는 제안을 했다. "그냥 돈을 모아 내는 것보다 우리가 시간을 들여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받은 돈을 기부하는 것이 어떨까? 선생님들 구두를 닦고 차를 세차해 받은 사례비를 모으자."

    그로부터 17년간 1학년 11반은 기부 전통에 더해 구두닦이 전통까지 이어오게 됐다. 세차는 '아이들이 너무 열심히 차를 닦아 흠집을 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점심 시간에 너무 힘을 쏟아 5교시에 조는 학생들이 있다'는 이유로 중간에 사라졌다.

    대부분 여고생들은 구두를 닦아본 일이 없다. 올해 1학년 11반도 남자 교사의 '특별 강습'을 받았다. 과거 몇차례 1학년 11반 담임을 했던 황성용(체육) 교사를 초빙해 ▲구두닦이 전용 천보다 스타킹이 잘 닦인다 ▲구두를 직접 신고 발을 올린 뒤 닦는 것이 편하다 등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담임 이수현(39) 교사로선 부담도 컸다.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들이고, 곱게 자란 아이들에게 구두닦이를 시킨다면 싫어할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있을 것 같았어요." 이 교사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부터 학생들에게 11반의 전통을 설명했고, 학생들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지난해 1학년 11반을 맡았던 김장원(30) 교사 역시 비슷한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교실이 지저분해질 수도 있고, 대학진학에 목표를 둔 인문계 학생들이다 보니 공부할 시간을 뺏는 것은 아닌가 부담이 됐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일을 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던 것 같아요."

    작년 연말 김 교사와 1학년 11반 전원은 홀트 일산복지타운을 방문해 1년간 구두닦이해 모은 돈 80만원과 다른 반에서 기탁한 성금 등 120만원을 기부했다. 지난해 이 반이었던 김다영(18·2학년 12반)양은 "홀트를 방문해 아이들과 장애인들을 만나보니 1년간 구두닦이한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고 했다. 이연아(18·2학년 10반)양은 "다른 반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구두약' 냄새가 난다고 놀렸지만, 점심시간에 할 일이 없어진 지금은 시원섭섭한 마음도 든다"고 말했다.

    가끔 귀여운 사고도 친다. 올해도 벌써 한 학생이 스웨이드 재질의 구두를 광을 낸답시고 구두약을 발라 얼룩덜룩하게 만들어 놓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구두 주인인 선생님이 이해하고 눈감아줬다.

    이수현 교사는 "학생 1명이 1년 동안 한 선생님 구두를 전담해 닦기 때문에 사제(師弟) 간의 돈독한 정을 쌓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며 "선생님들이 구두 닦는 학생에게 문제집 등을 챙겨 주기도 하고, 인기 좋은 선생님의 구두는 서로 닦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의 가장 낮은 곳을 보는 학생들도 속이 깊어진다. 민지원(17)양은 "선생님 구두가 너무 해져서 마음이 아팠던 때도 있었다"며 "부모님 구두도 다시 보게 됐다"고 말했다.

    홀트 홍미경 홍보팀장은 "1985년 홀트소식지에 '5년간 기부한 덕원여고 1학년 11반' 이야기가 실렸는데 30년간 계속해 왔다는 것이 놀랍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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