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2월 22일 일본러시아와의 해전을 앞두고 17세기 말 조(朝)·일(日)의 울릉도 영유권 분쟁에서 스스로 조선령이라 선포했던 량고도(독도)에 '다케시마'라는 새 이름을 붙여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 1906년 3월 28일 이를 알게 된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은 즉시 정부에 보고했고, 의정부 최고책임자인 참정대신 박제순은 5월 20일 지령 제3호를 통해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전속무근(全屬無根)하다'며 부인하고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명백히 했다."

30년 넘는 세월을 울릉도·독도 연구에 바친 송병기(宋炳基·77) 단국대 명예교수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울릉도와 독도, 그 역사적 검증'(역사공간)을 펴냈다. 고려대에서 한국근대사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딴 송 교수는 1978년 울릉도·독도도 한국외교사의 일부라는 생각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이후 '근대 한중관계사 연구'(1985), '울릉도와 독도'(1999), '한국, 미국과의 첫만남'(2005) 등 많은 저서를 냈다.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송병기 단국대 명예교수(오른쪽)가 자신의 저술 작업을 도운 제자 박성순 단국대 교수와 함께 최근 출간한‘울릉도와 독도, 그 역사적 검증’을 살펴보고 있다.

송 교수는 이번 책에서 '심흥택 보고서' '세종실록지리지' '청동기시대' 등 세 가지를 열쇳말 삼아 조선은 진작부터 울릉도·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독도의 영유권을 갑자기 주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심흥택 보고서는 1978년 8월 그가 서울대 규장각 서고를 3개월간 샅샅이 뒤져 발견했다. 당시의 기분을 그는 "얼떨떨했다"고 표현했다.

"독도에 관한 일본 최고(最古)의 문헌인 1667년 사이토 호센이 쓴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는 독도·울릉도가 조선과 가깝기 때문에 일본 영토는 오키에 국한한다고 했다. 반면 조선은 이보다 200여년 앞선 1454년(단종 2)에 펴낸 '세종실록지리지'에 울릉도·독도의 지지(地誌)를 싣고 있다. 이는 조선왕조가 15세기 중엽 이미 두 섬에 대해 영유 의지를 분명히 한데 비해 17세기 이전 일본의 역사에는 울릉도·독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송 교수는 청동기 시대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주장도 폈다. "서울대박물관 울릉도학술조사단이 1997~1998년 실시한 지표조사에 따르면 울릉도에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3기의 고인돌과 민무늬토기편이 발견됐다. 이는 이규원(李奎遠)의 '울릉도검찰일기' 1882년(고종 18) 5월 2일조에 '석장지(石葬址)가 있다'는 기록과 발견장소가 일치한다."

이번 저서는 파킨슨병을 오래 앓아온 송 교수가 병상에서 완성한 것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그는 병고와 싸우면서 약을 먹고 손 떨림이 덜할 때 원고를 종이에 직접 썼고, 제자들이 이를 컴퓨터로 정리했다. 이 과정을 5년간 거쳤다. 송병기 교수는 또렷한 목소리로 "그래도 힘든 줄 몰랐던 건 우리 실록과 지리지, 규장각 도서에다 에도시대 일본 자료까지 활용해 책을 썼기 때문에 일본인 그 누가 와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해도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증명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