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성과 노백린은 1895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1899년 동기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큰 사진〉(동그라미 속 인물이 생도 시절의 노백린. 윤치성도 이 속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나 누군지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노백린은 귀국하여 참위〈작은 사진〉와 정령을 거쳐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지냈고, 윤치성은 러일전쟁시 통역장교로 참전한 뒤 고종 황제 시종 무관을 맡았다. 이들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에도 군부에 남았지만, 1908년에는 해직되고 말았다.
윤치성은 포도대장 윤영렬의 셋째아들로 대부호인 데다가 사업 수완이 뛰어났다. 노백린은 교육 구국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비밀결사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해직된 이후 새로운 길을 찾다가 실업 구국활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윤치성과 노백린 등은 1909년 9월 해직 장교들을 중심으로 대한공업회(10월 대한흥업회로 개명)를 설립하였다. 윤치성이 회장을 맡아 자신의 집을 임시사무소로 제공했고, 노백린은 전참령 유동열 등과 함께 사무원으로 일했다. 자본금 2000만원 모금이 목표였는데, 정부에 30만원의 대부를 요청하는 한편, 군인들이 재직 중 적립한 군인구락부의 적립금을 자본금에 충당하기로 하였다.(통감부문서, 1909.9.14.)
대한흥업회에서는 한국산 가죽 산업이 유망하다고 보고 가죽제품 제조회사를 만들었다. 한국산 우피가 질이 좋아 상품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자본금 4만원을 투자하기로 하고 회사 이름은 대한제혁소로 정하였다. 도쿄에서 기계를 사고 기술자를 고용하여 1909년 12월부터 영업을 시작하였다. 대한흥업회에서는 가죽을 생산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한성판매소를 열었다. 더 나아가 한성제화소를 설립하여 대한제혁소에서 생산한 가죽으로 구두를 제작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 대한제혁소의 사업은 크게 발전하였으나 일제 강점 후 회사령으로 인해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한국의 가죽 산업은 일본인 자본의 조선피혁주식회사가 주도하게 되었다.(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
대한흥업회에서는 고려자기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자기회사도 설립하였다. 일찍이 자신의 집 행랑채에 가나다 상점을 열어 반찬 용달 사업을 벌였던 윤치성은 이 상점에서 도자기도 판매하였다. 그는 노백린과 함께 광주의 분원에서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사진과 혈죽을 새긴 자기필통을 만들어 판매하였다.(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 일종의 애국심 마케팅으로, 이에 대한 호응이 높자 1910년 8월 아예 자본금 4만원으로 광주 분원에서 도자기를 제조하여 판매하는 분원자기주식회사를 차렸다. 이에 '황성신문'은 논설에서 "고려시대 이래 세계적으로 우수한 도자기 전통이 부활하게 되었다"고 축하하였다(1910.8.18.) 분원자기주식회사는 1911년 6월 3일 설립 인가를 받기는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자본 부족으로 곧 청산되고 말았다.
대한흥업회는 일제 때문에 '군인의 길'을 포기해야 했던 해직 군인들이 선택한 '산업구국의 길'이었다. 그들이 개척한 가죽산업과 도자기산업도 '토종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