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Whypedia!] 아십니까? 詩人 피천득을

    입력 : 2010.04.03 04:06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1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탄생 100주년을 맞는 문인들을 위한 문학제가 열렸다. 조선이 강제 병합당한 1910년 태어난 문인은 피천득(皮千得·사진)과 안막(安漠)이다. 여기서 피천득과 관련된 새 사실이 밝혀졌다.

    교과서에 실린 수필 '인연'으로 기억되는 피천득(1910~2007)은 평생을 소년으로 산 문인이다. 그를 금아(琴兒), 즉 거문고소년으로 부른 이는 춘원 이광수(李光洙)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월반해 제일고보(경기고)에 다니던 소년의 재능을 맨 먼저 알아본 이도 춘원이었다.

    금아는 수필가로,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정년퇴직했다는 것 정도가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여러 권의 시집을 남긴 시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금아는 1930년 '신동아'에 '서정별곡' '파이프'가 게재되면서 등단했다.

    '겨울에 오셨다가/그 겨울에 가신 님이/봄이 그리워라/봄이 오면 그리워라/눈맞고 오르던 산에/진달래가 피었어요.'

    노래로 만들어진 금아의 시 '진달래'는 일절 꾸밈없이 담백하기 그지없다. 그가 남긴 일화들도 마찬가지다. 노(老)작가는 이웃에 폐가 될까 평생 벽에 못을 박지 않았고 액자들을 구석에 세워놓고 살았다.

    곰돌이 인형과 막내딸에게 주려고 산 인형이 밤에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안대를 해줬고 치매에 걸린 아내도 돌봤다. 92세에 동화를 발표했고 생을 마치는 날까지 글을 썼다. 그리고 잠자듯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유가족 대표로 피수영 대한신생아학회 명예회장(전 아산병원 교수)이 참석했다. 그는 금아의 차남이자 미숙아들의 대부(代父)다. 초미숙아는 임신 23주 미만, 몸무게가 500g 미만인 손바닥만한 아기를 말한다.

    피 교수는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아이들을 살려줬을 뿐 아니라 부모들이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로 친권까지 포기하는 사태가 속출하자 치료비를 지원해주는 후원단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흔이 가까운 피 교수는 금아를 '아빠이자 친구'라고 했다. 금아가 어머니를 '엄마'라 부른 것처럼 그들의 내면에는 맑고 치열한 영혼을 지닌 '소년'이 있는 것이다. 금아를 향해 오늘 우리가 '왜 행동으로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있을까.

    심포지엄 자리에서 총론을 발표한 권영민은 "1930년대 전후로 문인들은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지배이념에 대한 비판적 도전과 함께 새로운 창조적 실험을 지속했다"고 말했다.

    식민지 근대의 실상을 계급적 모순 구조로 인식한 계급문학운동과 모더니즘 문학운동, 이 두 가지가 함께 전개됐다는 것이다. 금아를 대신해 백발의 아들이 '이 순간'을 낭송했다.

    생전의 금아는 "모든 걸 버려도 나는 버릴 수 없다" "물질은 버려도 나는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라고 했다. 작가 정신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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