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2일 늦은 밤. 경남 진해 해군관사에 불쑥 남편이 나타났다. 얼룩무늬 전투복에 철모를 눌러쓴 차림. "여보,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며칠 못 들어올지 몰라. 아이들 데리고 잘 지내고 있어요." 미국에 전함을 구매하러 간 지 여러 달 만에, 그리고 6·25전쟁이 터진 이후 처음으로 집에 온 남편은 이 말만 남기고 집을 나섰다. 3일 후 남편은 연합군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인천 앞바다에 있었다.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故) 손원일 제독. 그가 바로 내 남편이다. 전쟁 중엔 남편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어쩌다 배 수리를 하러 부산에 올 때 새벽에 잠깐 들른 게 전부다. 하지만 군인의 아내로 살면서 각오했던 일이다. 남편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나는 그런 남편을 존경했다.
나는 남편을 돕고 싶었다. 군인의 아내로서 뭘 할 수 있을까. "해군들이 전쟁터에서 직접 싸운다면, 우리 부인들은 전쟁에서 다친 이들을 도우면 되겠구나."
매주 수요일마다 해군병원을 찾아가 아픈 병사들의 이불·베개·옷 등을 빨고 중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았다. 병원은 부상자들로 넘쳐났다. 전쟁에서 팔을 잃은 사람, 눈 하나를 잃은 사람, 다리를 잃은 사람….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병원은 만원이고, 의사도 간호사도 없는 형편이었다. 환자의 썩어들어가는 다리에서 구더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해군부인회 회장이었던 나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돕기 위해 해군 부인들과 함께 모금활동도 벌였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전쟁에서 상처 입은 환자를 도와주세요!"라고 외쳤다. 늘 몸뻬(허드레 바지)만 입고 돌아다니는 내게 이승만 대통령은 '몸뻬 부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하지만 모두 어려운 피란민 처지라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100원, 200원 정도 모으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아이디어를 냈다. 해군 부인들이 삯바느질을 해서 해군의 작업복을 만들겠다고 제안하니 남편도 흔쾌히 찬성했다. 남편의 지원으로 공장을 짓고 재봉틀 50대를 들여왔다. 해군부인회원들은 이 수입으로 장애를 가진 군인들을 도울 수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30년이 됐다. 내 나이 아흔셋. 요즘도 나는 울적해지면 해군 노래를 부른다. 특히 남편이 작사하고 내가 작곡한 '바다로 가자'는 우리 부부가 제일 좋아하는 군가다.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이 몸과 맘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