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2월 16일 오전 9시 30분 도쿄 철도호텔 14호실에서 국민협회 회장이자 '시사신문' 사장 민원식(閔元植)이 칼에 찔려 암살당했다. 일본 옷차림의 청년이 찾아와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때에 참정권 운동을 벌이는 것은 매국노"라면서 논쟁을 벌이다가 처단한 것이다. 경찰은 보도를 금지한 상태로 수사를 진행하여 같은 달 24일 나가사키에서 상해로 출항하려는 배를 타고 있던 양근환(梁槿煥)을 체포했다.

민원식은 1910년 1월 1일부터 '시사신문'을 발행하던 친일파로, 1920년 4월 1일부터 같은 제호의 신문을 두 번째로 발행하면서 '신일본주의'를 주창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신문 발간에 관심을 가져, 내부(內部) 위생과장 때인 1907년 9월 '위생신문'(월간)을 창간했고, 1909년 10월에는 대동일보(大同日報) 사장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시사신문'은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와 한통속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황성신문, 1910.3.23., 대한매일신보, 3.24.) 1910년 5월까지 100호가 발행되었으나, 강제합방 후에는 한국인 발행 신문이 모두 문을 닫게 되었기 때문에 계속할 수 없었다. 1920년 총독부가 조선인 발행 신문 3종을 허가하여 조선일보가 제일 먼저 3월 5일에 창간되었고, 4월 1일 동아일보와 시사신문이 뒤를 이었다.

민원식은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일본에 살았고, 후쿠오카 소재 동아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20세 때(1906년) 귀국한 뒤 이등박문의 눈에 띄어 구한국 내부 위생과장, 제실(帝室) 회계심사위원을 거쳐 합방 후에는 고양군수, 이천군수를 역임했다. 3·1운동 직후 매일신보에 '소요의 원인과 광구예안(匡救例案)'(1919.4.9.~16.)을 8회 연재하며 3·1운동을 비판했다. 같은 해 7월에는 8백여명의 서명을 받아 조선인의 참정권 청원을 목적으로 일본에 갔다 온 적도 있다.

미국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는 '맛당히 죽여야 할 민원식'이라는 제목으로 "3월 이후로 원수의 환심을 사려는 추악한 언론을 왜신문지들에 발표하여 식자의 조소와 청년의 분노를 받던 고양군수 민원식은 근일에 '신일본주의'라는 괴악한 선전서를 분포하여 왜적의 창귀되는 직책을 완성하려 한다더라"고 비판했다.(신한민보, 1919.11.27.)

양근환은 28살 청년이었다. 노동을 하면서 니혼대학 정치경제과에 적을 두고 일본 여자와 결혼하여 두 딸이 있었다. 양근환이 체포된 후 무기징역을 받아 복역하는 동안 그의 가족을 돕자고 모금하는 사람도 있다고 조선일보가 보도했고(1921.8.17.), 4년 뒤에는 어머니와 딸을 방문하여 소식을 알렸다(1925.4.15.). 양근환은 13년 복역 중 감형되어 1933년 2월 가출옥했다(가출옥 후 조선일보를 방문했을 때의 양근환[중앙], 오른쪽은 딸). 광복 후에는 친일파 척결과 반공을 목적으로 혁신탐정사를 설립하고 '혁신보(革新報)'를 창간했다가 이듬해 3월 '여론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하였는데 6·25전쟁 때 납북 피살되어 풍운의 일생을 마쳤다. 민원식이 암살당하자 일찍부터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던 '시사신문'은 저절로 폐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