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빠에게. 아빠가 말씀하신 대로 포기하지 말자, 힘들어도 꾹 참고 하자, 열심히 하자 등등 이런 말 머릿속에 입력해 둘게요. 그리고 시간이 많이 남았을 때 공부도 잘할게요. 그리고 호강시켜 드릴게요. 대신 오빠에게 잔소리 치지 마세요….' '아빠. 엄마. 제가 훌륭한 선수 되면 집도 이사 가고, 세탁기도 사고, 가스레인지도 사고, 냉장고, 가정용품은 다 사드릴게요.'
2000년 12월, 춘천에서 스피드 스케이팅 동계 훈련 중이던 은석 초등학교 5학년생 이상화는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를 부모에게 보냈다. 열한 살 소녀는 얼마 전 아버지가 처음 사주신 노란색 선수용 스케이트(날의 뒷부분이 신발로부터 분리되는 클랩 스케이트)가 너무 좋았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아버지 이우근(53)씨가 '딸을 위한 장비 값을 아낄 수는 없다'며 120만원을 들여 산 230㎜의 노란색 스케이트였다.
발이 쉽게 부어오르는 일반용 스케이트를 신고도 전국대회를 휩쓸던 그에게 이 스케이트는 '날개'나 마찬가지였다. 소녀의 편지엔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여동생 때문에 스케이트 선수의 길을 포기한 세 살 터울 오빠에 대한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이상화(21·한국체대)는 밴쿠버에 우뚝 섰다.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집에 있는 달력의 '2월 16일' 날짜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인생역전!'이라고 썼던 그였다. '인생역전'은 "나도 김연아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말겠다"며 스스로 건 주문이었다. 그러나 경기 전날인 16일 서울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긴장을 이길 수 없다"며 울 정도로 떨렸다.
그런 이상화에게 마법처럼 우승이 찾아왔다. 그는 17일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우승하자마자 또 울음을 터뜨렸다. 초등학교 동창인 '절친(절친한 친구란 뜻)' 모태범이 16일 금메달 세러모니로 익살맞게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나도 금메달 따면 저렇게 해 볼까'라고 생각했던 이상화였다. 하지만 이상화의 눈에선 지난 4년간 흘렸던 땀방울이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경기 내용도 극적이었다. 이상화는 500m 1·2차 레이스를 모두 세계기록 보유자이자 '스프린트 여제(女帝)'라 불리는 예니 볼프(독일)와 함께 뛰었다. 1차 레이스에선 38초24를 기록하며 볼프를 0.06초 차로 제쳤고, 2차 시기에선 볼프(37초83)에게 0.02초 뒤진 37초85를 찍었다. 이상화의 합계기록은 76초09. 볼프는 76초14였다. 이상화는 0.05초 차이로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첫 여성 동계올림픽 500m 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이 금메달로 '서울올림픽둥이'인 89년생 모태범·이상화는 미국과 독일 등 빙상 강국들도 이루지 못했던 단일 동계올림픽 남녀 500m 동반 우승까지 차지했다.
이상화는 "원래 신나는 음악을 좋아하는데 올림픽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클래식 음악을 들은 적이 있다. 태범이가 그걸 보더니 '하던 대로 하라'고 해서 다시 음악을 바꿨다"고 말했다. 1989년생 동갑내기 '절친'의 충고가 그때만큼 고마운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