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라이프]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힘, 아버지

    입력 : 2010.02.12 15:51 | 수정 : 2010.02.14 11:02

    <이 기사는 웰빙라이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왜 그땐 미처 몰랐을까 '아버지의 자리'

    당신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는 언제나 그래야만 했습니다. 항상 뒤돌아선 곳, 안 보이는 곳에서 우셨습니다. 자식이 밤늦게 돌아올 때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보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야 보고 싶고, 그 분의 말씀은 불가능한 곳에서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지난날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였고, 지금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내 인생을 묵묵히 이끌고 지탱해 준 우리들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힘, 아버지

    늘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던 한분을 떠올려 본다. 항상 나의 든든한 어깨가 되어주셨던 분, 바로 나의 아버지를. 우리 이웃들의 아버지, 그리고 나의 아버지에 대한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들을 함께 들어보자. 

    생선장수 아버지의 동그라미 그림편지  김경태

    나 어릴적, 우리 아버지에게선 언제나 생선비린내가 났다. 아버지는 생선장수셨다. 팔다 남은 생선이 늘 올라오는 밥상도 싫었고, 글씨를 몰라 툭하면 자고 있는 나를 깨워 뭐든 읽어달라고 하시는 아버지도 정말 싫었다. 아버지는 혼자만 아는 그림으로 돈 계산을 하셨고, 그러다가 그 계산이 맞지 않는 날에는 밤새도록 그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며 날을 새기도 했다.

    그렇게 창피하게 생각한 아버지가 벌어 온 돈으로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좋다기보다 아버지를 떠나 살게 된 것이 너무나 좋았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날 밤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여기 이 봉투에다가 니가 있을 곳의 주소좀 써봐. 여따가 전부 다 써놓고 가야지 돼야. 내가 까막눈인 게 글씨를 못 쓰잖여. 니가 보구잡아도 답답해서 살수가 있것냐? 전화도 없잔여” 아버지는 족히 수십장은 되어 보이는 편지봉투를 내 앞으로 밀어놓으셨다. 나는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건성으로 주소를 써서 아버지께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췻 집 주인아주머니가 낯익은 편지봉투 한 장을 건넸다. 내 글씨였다. 나는 그제야 내 고향을 생각했고, 그곳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봉투를 여는 손끝이 떨려왔다. ‘글씨도 모르는 아버지가 과연 어떻게 글씨를 쓰셨을까?’

    편지에는 글씨 대신 커다란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 동그라미는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오직 딸 하나만을 위해 생선을 팔고 계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편지지를 펴놓고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아버지가 그린 이 동그라미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우리 아버지를 향해, 내가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했던 아버지를 향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아버지 죄송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세요. 아버지 허리 편찮으신 건 좀 어떠세요’ 여기까지 써 내려가던 나는 그만 큰소리로 울어버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는 내가 싫어서 눈물이 났고, 딸이 보낸 이 편지를 아버지가 읽지 못하시는게 서러워 눈물이 났다.

    주말을 이용해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셨다. 방에 들어선 나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며칠 전에 내가 보냈던 그 편지를 보았다. 편지 봉투는 열려져 있었다. 내 마음을 눈치 채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니 편지를 받았는디 읽을 수가 있어야재. 그래 내가 이장님한테 달려가서 읽어 달랬지 뭐... 참 근디 너도 내편지 잘 받았재?”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돌아서서 눈물을 닦아야 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근디 왜 안 묻냐? 그 동그라미가 뭔 뜻인지 니도 안기여?”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인심 좋은 웃음을 웃으시며 “몰랐구먼… 그건말여, 나는 잘 있응께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여. 그라고 너도 잘 있냐 뭐 이런뜻도 되고... 어떠냐? 내 머리가 좋제?” 아버지는 그렇게 웃고 계시는데, 내 눈에선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가끔 내게 편지를 보내셨다. 편지에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는 물론이고 가끔은 세모도 그려져 있었고, 또 더러는 알지 못할 이상한 그림도 그려져 배달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젠 그림문자로 편지를 보내주실 내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나던 그 정겨운 생선비린내도 이제 맡을 수가 없다. 나이를 이만큼 먹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보내주시던 그 편지가 내게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는지를… 그리고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를… 

    아버지의 손  김정옥(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2동)

    차 안에서 들은 라디오 방송에서 ‘아버지의 손’을 언제 잡아봤는지를 물어보더군요.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결혼식 전 아버지랑 신부 입장을 위해 연습하면서 한 번, 돌아가시기 보름 전부터 병원에 누워계신 아버지 손을 잡으면서 울었을 때 한번….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주름진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한없이 울었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엄마 손처럼 자주 잡아주세요. 

    아버지의 수첩  백신지(부산시 영도구 신전동)

    다들 잠든 밤늦은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아버지의 수첩을 집어 들었다. 생전에 항상 가지고 다니시던 수첩.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신 뒤 남은 유품 중 내 손에 와 있는 몇 가지 중 하나.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집안 경조사와 가족들의 생일 등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그중 눈길이 멈추는 곳이 있었다. 과외비란. 어려운 집안 형편에 자식들 과외 시키느라 무척이나 힘드셨을 것이다. 친구 분들에게 과외비를 빌리러 다닌 내용까지 적혀 있었다.

    다이어리 수첩이 6월로 넘어가니 메모가 띄엄띄엄 적혀 있었다. 뒤로 넘어갈수록 아무것도 없는 백지장. 더 쓰려고 해도 쓸 수 없었을 게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깐. 바쁘다는 핑계로 떠나가신 아버지 생각을 잊고 살았는데… 이제 내가 그 빈 수첩을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서운했던 마음도, 이제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도 모두 그 백지에 채워갈 것이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버지와 우리 딸  조은영(서울시 강남구 도곡동)

    저희 아버지는 10년 전쯤 정년퇴임을 하셨어요. 그런데 쉬신 지 한달도 채 안 돼 경비직을 구하셨지요. 저를 비롯한 온 식구가 말렸지만 고집을 꺾지 않으셨어요. 먹고살 만한데 일한다는 것도 마땅찮았고 제 딴에는 사실 조금 창피하기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가끔 재활용품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도 싫었고요.

    그런데 얼마 전 6학년인 딸아이가 학교에서 직업에 관한 공부를 하다, 선생님께서 조부모님 중 직업을 가지신 분이 있느냐는 질문에 냉큼 손을 들고 “저희 할아버지는 경비로 일하세요. 연세가 칠십이 넘으셨는데도 열심히 일하시는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전 저보다 훨씬 속이 깊고 훌륭하게 자라준 딸이 자랑스럽고, 아버지를 더 사랑하게 됐답니다. 계속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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