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라이프] 고교 체육대회…나무 뒤의 그 눈길_황선미

    입력 : 2010.02.12 15:49 | 수정 : 2010.02.14 10:19

    <이 기사는 웰빙라이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왜 그땐 미처 몰랐을까 '아버지의 자리'


    당신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는 언제나 그래야만 했습니다. 항상 뒤돌아선 곳, 안 보이는 곳에서 우셨습니다. 자식이 밤늦게 돌아올 때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보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야 보고 싶고, 그 분의 말씀은 불가능한 곳에서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지난날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였고, 지금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내 인생을 묵묵히 이끌고 지탱해 준 우리들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여고시절 체육대회 때 학교를 찾아온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카메라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있자 아버지는 팔짱을 하라며 틈을 만들어주셨다.

    명사 에세이 '아버지의 추억'

    동화작가 황선미

    중학생이 되는 아들의 입학식에 갔다. 황사 바람이 부는 추운 운동장. 10시에 시작한다고 20분 전부터 애들을 줄 세우더니 10시20분이 지나도록 교장 선생님은 나오지 않았다. 중학교가 뭔지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마이크를 잡은 선생님은 열중쉬어, 차려를 반복하고, 파랗게 깎은 머리에 달랑 교복만 걸친 애들은 줄지어 선 채 시키는 대로 하는 살풍경. 문 앞까지만, 길 건너까지만, 철둑 너머까지만 하면서 따라나섰다가 운동장 한쪽에 서서 시린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벌을 섰다. 이가 딱딱 부딪치도록 추워본 게 참 오랜만이었다. 그만 돌아가 버릴까, 하면서도 교실로 가서 자리에 앉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흐뭇해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아버지 생각을 했다.

    고등학생 때 체육대회 날. 반 대표로 배구를 하다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그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뭇 사람들 속에서 나만 보고 있는 깊고도 특별한 눈길. 와글거리는 사람들에 가려져,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아버지는 환영 같았다. 멀리 있는데도, 슬쩍 보았을 뿐인데도 아버지가 마치 빙그레 웃고 있다고 느껴진 것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어서였을까. 입학식에도 졸업식에도 식구들이라곤 찾아온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졸업식 날 학교 대신 시장을 쏘다니다가 집에 간 적도 있었는데. 하물며 가을 체육대회 정도에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가 예고도 없이 오시다니.

    아버지를 발견한 순간부터 나는 당황했다. 서브를 제대로 할 수도, 공 한번 받아치기도 힘들 만큼 아버지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너무 고지식해서 어렵고 두려웠던 아버지. 망해서 고향 떠난 뒤로는 한달에 한번쯤 집에 오는, 그나마도 밤차로 와서 이튿날 새벽차로 떠나버려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우물가에 수북한 기름빨래로나 확인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그날 점심 때 내게 다가와 모찌떡 세 개와 바나나 우유를 주셨다. 금방 가지도 않고 내 옆에서 내가 꾸역꾸역 떡 먹는 걸 지켜보셨다.

    아버지가 너무 어려워 나는 “아버지도 좀 드세요” 소리도 못하고 혼자 그걸 다 먹었다. 도시락이라는 걸 싸본 적이 없었던 터라 목에 걸린 듯 뻐근하던 그때의 떡 맛을 나는 못 잊는다.

    아버지가 중동 파견 노무자로 일하다 3년 만에 돌아온 직후였다. 농토를 빚에 넘기고 도시를 전전하며 날품을 팔다가 배운 용접기술. 그건 아버지에게 자부심이자 고통이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용접 기술로 미군부대, 용산 비행장, 대우빌딩 등 배관공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다니다가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다녀오는 동안 아버지는 용접에 관한 한 프로가 됐다. 아버지를 고용한 독일 사장이 아버지를 “코리아 넘버 원, 미스타 황”이라고 불렀다니까.

    그러나 평생 못 벗어난 가난처럼 살 속까지 파고드는 불똥과 눈을 쑤시는 푸른 연기. 아버지가 아파했던 건 쇠를 녹인 불똥이 튀어 생긴 상처보다 푸른 연기에 쏘인 눈의 고통이었다. 아버지의 신음소리에 서늘한 밤을 보냈던 가족들.

    아버지는 병상에서 내게 말했다. 언젠가는 리야드에 가보라고. 그곳 의과대학병원의 배관을 아버지가 용접했다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배관을 어찌 보겠나 하면서도 나는 언젠가 한번은 리야드 의과대학병원이라는 데를 가보고 싶어진다. 중학교도 못 간 딸이 안타까워서 편지 끄트머리에 ‘월급에서 5000원은 선미가 보고 싶은 책을 사보게 줘라’ 하고 쓰셨던 아버지.

    엄마한테서 단 한번도 5000원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버지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중학교에 못 보낸 걸 미안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딸이 고등학교에 가서 체육대회라는 걸 한다니까 아버지는 구두까지 닦아 신고 찾아와 주셨다. 배구공 하나 멋지게 넘기지도 못한 딸을 지켜봐 주시고, 먹을 걸 사서 말없이 주고 가셨다. 그 일이 두고두고 감사하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가끔 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중요한 자리에 가게 될 때는 더 주변을 살펴본다. 그림자처럼 내 뒤에, 뭇사람들 속에 아버지가 섞여 있을 것만 같아서. 시침 뚝 떼고 먼발치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돌아가신 지 벌써 몇 년이나 됐는데도 그 버릇이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디선가 아버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믿는다. 그래도 어떤 날에는 어디쯤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신호로라도 느껴졌으면 싶다. 너무 힘든 날이나 굉장히 기쁜 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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