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라이프] 장미 한송이를 들고 여섯시간을 서 계시던 시인_박동규

    입력 : 2010.02.12 15:37 | 수정 : 2010.02.14 10:13

    <이 기사는 웰빙라이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왜 그땐 미처 몰랐을까 '아버지의 자리'


    당신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는 언제나 그래야만 했습니다. 항상 뒤돌아선 곳, 안 보이는 곳에서 우셨습니다. 자식이 밤늦게 돌아올 때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보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야 보고 싶고, 그 분의 말씀은 불가능한 곳에서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지난날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였고, 지금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내 인생을 묵묵히 이끌고 지탱해 준 우리들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명사 에세이 '아버지의 추억'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아버지가 가신지도 벌써 이십육년이나 지나갔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버지가 “차 한 잔 하자”하시며 현관에 들어서실 것 같다. 내 기억 속에는 이름난 시인으로서의 아버지보다 우리 가정 안에서 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더 진하게 남아 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였다. 나는 “어머니, 언제가 가장 기쁘셨어요?”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병마로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잔잔하게 웃으시면서 “너의 아버지가 수술실 밖에서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계실 때였다”고 하셨다. 오십년 전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방안에 앉게 하고 일일이 껴안고 볼을 만지시고 “아버지 말 잘 듣고 있어”하고는 병원으로 가셨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목 근처를 가르는 생명을 건 어려운 수술이었다. 어머니는 이 수술로 평생 목둘레에 목걸이처럼 흉터가 있었다.

    거실에서 아버지(오른쪽 박목월)와 함께. 성적표를 보지 않고 아들의 말을 믿던 선량한 마음의 아버지였다.

    평상의 생활로 돌아온 후 어머니는 수술로 여섯 시간이 흐른 후 겨우 마취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수술실 유리창 밖에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아버지가 서계신 모습이 첫눈에 보이더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로부터 또 몇 십 년이 지난 뒤까지 어머니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여섯 시간을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수술실 밖에서 동동 발을 구르며 서있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사셨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는 성적표를 보자고 하지 않으셨다. 학기가 끝나 성적표를 어머니에게 내밀면 어머니는 아버지방으로 나를 데려 갔고 아버지는 딱 한마디 “잘했나”하고 물으셨다. 내가 “잘했어요”하고 대답하면 아버지는 “그래 더 잘해라”하셨고 “못했어요”하면 “다음에 잘하면 되지”하셨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쯤 나는 오히려 성적표를 내미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성적표보다 아들의 말을 믿으셨다.

    너무 마음이 비단같아 얼마나 사시기에 힘이 드셨을까 이제야 겨우 알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힘들지”하고 다가오는 것 같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