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라이프] 밥하시는 모습이 그땐 창피했지만…_서영은

    입력 : 2010.02.12 15:34 | 수정 : 2010.02.14 10:11

    <이 기사는 웰빙라이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왜 그땐 미처 몰랐을까 '아버지의 자리'


    당신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는 언제나 그래야만 했습니다. 항상 뒤돌아선 곳, 안 보이는 곳에서 우셨습니다. 자식이 밤늦게 돌아올 때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보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야 보고 싶고, 그 분의 말씀은 불가능한 곳에서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지난날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였고, 지금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내 인생을 묵묵히 이끌고 지탱해 준 우리들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해방 전후 40대 중반의 아버지(서장일씨),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다.


    명사 에세이 '아버지의 추억'


    소설가 서영은
     

    아버지는 내가 열아홉 살 나던 해 여름, 62세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인생의 3분의 2 이상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지나간 까닭에, 나는 아버지를 내 생각만큼씩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일곱 살 무렵의 아버지는 나에게 올라타는 말이었다. "이랴 낄낄"하고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등판을 두드리면, 말이 된 아버지는 방 안을 엉금엉금 기어다녔다. 어머니는 삼대 독자인 외아들보다 딸을 더 귀여워하는 아버지를 못마땅히 여겼다. 불만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휴일만 되면 낫을 보자기에 싸들고 ‘밥이 나오는 것도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닌’ 산소에 가자고 채근하는 것은 ‘벽창호’ 같은 짓이었고, 몇 천평 되는 금싸라기 땅에 집 없는 사람들이 집을 지어 살도록 묵인해준 것은 '천치' 같은 짓이었고,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땅콩과 은행을 가마니로 받아오는 것도 '등신'같은 짓이었다.

    어머니는 살을 섞고 살면서도 아버지가 받드는 하나님이 그의 내면에 어떤 길을 은밀하게 만들어가는지 알지 못했다. 어린 자식들은 더욱 그랬다. 수년에 걸친 어머니의 무지한 폄하에 세뇌되어, 부부싸움을 하면 우리는 은근히 어머니를 편들어 아버지를 외롭게 만들었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급우의 어머니는 기생 출신으로 다방마담이었는데, 다른 급우의 아버지들이 그 다방에 드나들며 많은 염문을 뿌렸다. 나는 염문을 뿌리는 아버지를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다. '왜 우리 아버지는 바람을 안 피울까' 사춘기 때의 내 눈망울에는 불만과 원망이 가득 서려 있었다. 아버지를 '무능한 사람'이라고 타박하던 어머니는 드디어 바깥세상을 향해 자기의 능력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한복에서 양장으로 바뀌었고, 귀가시간이 끼니 때를 넘기기 일쑤였다. 학교가 파한 뒤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오면, 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었고, 우리가 허기질 사이 없이, 밥을 해서 상을 차려주었다. "너네는 왜 아버지가 밥을 하냐"고 친구들이 물으면, 나는 그런 아버지가 창피해서 얼굴을 돌리곤 했다.

    자유당 시절 어머니가 민주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너무나 열렬히 한 것 때문에, 공무원인 아버지는 직장을 내놓아야 했고, 그 이후 우리집은 동네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반푼’들의 집합소가 되어 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한 아버지를 보며 나는 ‘이담에 크면 아버지하고 정반대인, 깡패 같은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의 철없는 생각, 가족들의 몰이해가 가슴을 치는 회한으로 바뀌는 날을, 살아서는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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