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동섭의 X코리언] 조선 첫 서양식 병원 '제중원' 의사 된 박서양

  • 김동섭

    입력 : 2010.02.06 08:17 | 수정 : 2010.02.06 22:25

    "내 몸에 흐르는 白丁 피 대신 과학의 피를 보라"
    양반들 병원 일 싫어해 제중원 입학 기회 잡아…

    국가보훈처 제공
    SBS-TV 월화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박용우)'은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의사가 된다. 그 뒤 조선 독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치료하는 군의(軍醫)의 삶을 택한다.

    그런데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인 서양 의사 '황정'은 실제 인물일까? 그는 실존했던 백정(白丁) 출신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바뀜) 졸업자였으며 독립군에 투신해 군의가 된 박서양(朴瑞陽·사진)이다.

    드라마처럼 어릴 적 이름이 '적은 근수가 나가는 개'라는 뜻의 '소근개'는 아니지만 천대받던 백정의 아들이었다. 백정은 기생·갖바치·무당·광대 등과 함께 당시 신분이 가장 낮은 천민 계급이었다.

    백정은 상투를 틀 수도 없고 갓을 쓸 수도 없었다. 결혼해도 가마를 탈 수 없고 돈이 있어도 집에 기와조차 얹지 못했다. 그는 1908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1회로 졸업했다.

    정부로부터 우리나라 최초 의사 면허인 '의술 개업 인허장'을 받은 7명 중의 하나였다. 백정의 아들이 의학교에 입학할 만큼 당시 우리 사회가 개방적이었을까. 세브란스 1회 졸업생 7명 가운데에는 쟁쟁한 인물들도 여럿 있었다.

    홍석후는 작곡가 홍난파의 형이었고 김필순은 매제가 임정요인인 김규식이었다. 그러나 이 중에는 관기(官妓)의 아들인 주현측도 있었다. 백정 아들과 관기 아들이 입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양반들이 병원의 지저분한 일을 할 수 없다고 입학을 기피해 중인·평민들이나 기독교인들이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서양은 세브란스 교장 에비슨과 친분 있던 아버지 덕분에 1900년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했다.

    허드렛일을 시켜 그의 됨됨이를 본 에비슨이 그를 입학시켰다. 그의 이름은 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3일)에도 나온다. "난산(難産)의 고통을 겪고 있던 서울 합동의 김부인을 제중원 의사 허스터씨와 의학생 박서양씨가 소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졸업 후 모교에서 해부학을 가르쳤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만든 승동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산소와 수소를 이용한 공개 화학실험을 선보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그의 신분을 문제 삼아 천시한 적이 있다.

    그러자 "내 속에 있는 오백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한일합방이 된 뒤인 1917년 돌연 만주로 떠나면서 그는 국내에선 잊혀졌다.

    그는 연길에서 구세(救世)병원을 세우고 숭신(崇信)학교를 지었다. 한국인을 위한 진료와 교육 활동을 했다. 만주 지역의 독립무장투쟁단체인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군의(軍醫)로 임명돼 활동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그의 졸업 동기인 김필순이나 주현측, 신창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가 만주로 떠난 뒤 그의 행적은 단지 일제가 남긴 군(軍) 기밀서류에만 남아 있었다.

    잊혀졌던 박서양의 독립운동 기록은 박형우 연세대 의대교수가 발굴했다. 이 기록으로 그는 숨진 지 68년이 지난 2008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의 뒷얘기는 칠레로 이민 간 그의 손자(74)가 2005년 귀국하면서 알려졌다.

    박서양은 만주에서 돌아와 1940년 55세로 경기 고양에서 숨졌다고 한다. 3남3녀를 두어 큰아들은 세브란스 의대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다. 그의 동생 대양은 세브란스 의대를 나왔고 그의 여동생은 의사와 결혼했다.

    신분 차별 철폐의 상징인 박서양은 백정 선교에 나섰던 승동교회의 무어 선교사와 에비슨, 그리고 아버지 박승춘의 이름과 함께 우리 백정 해방의 역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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