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폐간과 함께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 1939년 11월 1일부터 조선일보에 연재 중이던 '삼국지'도 281회로 중단됐다. 한용운은 조선일보 강제 폐간에 울분을 느끼며 '신문이 폐간되다'라는 한시(漢詩)를 써내려갔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絶筆墨飛白日休)/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진 서울의 가을(銜枚人散古城秋)/한강물도 울음 삼켜 흐느끼며(漢江之水亦嗚咽)/연지(硯池)를 외면한 채 바다로 흐르느니!(不入硯池向海流)'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만해(萬海) 한용운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일보 기자들보다 조선일보 지면에 더 많은 글을 쓴 사람이다. '님의 침묵'의 시인으로 유명한 그는 조선일보를 통해 소설가로 데뷔했다. 그의 첫 소설 '흑풍(黑風)'은 1935년 4월 9일부터 1936년 2월 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됐다. 조선일보는 1935년 4월 2일자에서 '흑풍' 연재 예고를 통해 '님의 침묵이란 시집으로써 이미 시인으로서의 선생을 대하였거니와 금번 이 흑풍으로써 다시 소설가로서의 선생을 대하게 됩니다'라며 '선생의 소설은 다른 소설과 유(類)가 다릅니다. 좀 더 다른 의미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좀 더 다른 의미'란 한용운의 소설 속에서 독자들이 '민족의식'을 찾아줄 것을 주문하는 표현이었다. '흑풍'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이 소설을 읽기 위해 조선일보를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신문 발행부수도 6000부나 늘었다.
한용운은 이어 1938년 5월 18일부터 이듬해 3월 12일까지 223회에 걸쳐 소설 '박명(薄命)'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한용운이 생전에 발표하고 완성한 소설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흑풍'과 '박명' 2편뿐이었다. 그는 '죽음' '철혈미인' '후회' 등 소설 3편을 더 남겼지만, 이는 모두 미발표 혹은 미완성 작품이다.
한용운이 조선일보 지면을 빛낸 것은 소설만이 아니었다. 그는 논설 '조선 청년에게'(1929년 1월 1일), 기행문 '명사십리행'(1929년 8월 14~24일), 연작시 '심우장 산시'(1936년 4월 3~5일), 수필 '심우장 만필'(1936년 3월 19~20일)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한용운이 조선일보에 거는 기대는 남달리 컸다. 그는 조선일보 태평로 사옥의 낙성을 축하하며 "조선 사람의 문화정도가 진보된 상징"(1935년 7월 6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태평로 사옥 낙성 축사에서 "나는 방(응모) 사장이 많은 금전을 내어서 조선일보를 경영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와 같은 굉장한 건물이 번듯이 나타나게 됨에 따라 과연 그이는 거룩한 사업을 하는 훌륭한 분이구나 하는 느낌을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용운은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 겸 경성지회장을 맡았을 때 역시 신간회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인 조만식의 소개로 방응모와 친분을 나누게 됐다. 1930년대 후반 한용운은 조만식·홍명희 등과 함께 방응모의 죽첨정(현 충정로) 집에서 자주 만나 술을 마시며 시국을 논의했다.
10여년 이상 글을 발표하면서 깊은 애정을 나누던 조선일보의 폐간은 한용운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폐간호에 실린 그의 마지막 '삼국지'의 내용은 주유가 형주(荊州) 진출을 꾀하면서 장수들에게 전투를 독려하는 대목이다. "그대들이 싸우지 아니하면 어찌할 작정이뇨. (중략) 어찌하여 나 한 사람을 위하여 국가의 큰 일을 폐하리오." 이렇게 조선일보 폐간을 안타까워하던 한용운은 4년이 지난 1944년 6월 광복과 조선일보 복간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
입력 2010.02.05.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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