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계초(방응모) 인수후 지면 혁신·문화사업… "조선일보는 文化신문"

    입력 : 2010.01.22 06:15

    조선일보가 1934년 주최한 유치원 원유회 사진 화보. 1934년 5월 19일자에 실렸다. /조선일보 DB

    1933년 7월 19일 제8대 사장 조만식(曺晩植)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제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方應謨)는 한 달 후 동아일보에서 이광수(李光洙)와 서춘(徐椿)을 스카우트해 각각 부사장과 주필(主筆)에 임명하는 등 인적 쇄신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대대적인 지면혁신을 단행했다.

    9월 27일 당대 최고의 소설가였던 부사장 이광수는 소설 '유정(有情)'을 연재했고 같은 날부터 데스크칼럼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부장 이상 간부들의 고급교양 연재가 시작됐다. 주필 서춘은 '런던 회의 後의 세계경제'를 썼고 편집고문 문일평(文一平)은 '한말외사(韓末外史)', 정치부장 함상훈(咸尙勳)은 '경지제한(耕地制限)과 산업증식(産業增殖)', 조사부장 홍기문(洪起文)은 '비교언어(比較言語) 연구', 외보부장 홍양명(洪陽明)은 '독일의 실지(失地)회복문제', 조사부 차석 신태익(申泰翊)은 '조선인 상경영(商經營)의 결함', 정치부 차석 한보용(韓普容)은 '미국의 소련 승인(承認)문제'를 집필했다. 한눈에 봐도 상당한 전문성이 뒷받침된 논설들로 독자들의 교양수준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조선일보는 지면을 통해 세계를 보는 눈을 제공하는 한편 각종 문화사업을 활기차게 전개해 신문의 사회교육기능을 강화했다.

    먼저 경영난으로 중단됐던 '전경성(全京城) 유치원 연합 원유회(園遊會)'를 부활해 5월 26일 제5회 원유회를 대규모로 개최했다. 또 5월에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금액인 1000원을 내걸고 '현상 소설'을 공모했다. 당시 한글기념일은 10월 29일이었다. 조선일보는 하루 전날 "한글 사용의 정확(正確)은 민족적 중대책임(重大責任)"이라는 장문의 기사를 싣고 29일에는 조선어학회가 마련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案)'을 특별부록으로 찍어 전국의 독자들에게 무료로 배포했다.

    이런 대대적인 문화운동 전개로 인해 1933년 말이 되면 언론계와 식자층 사이에 "조선일보는 문화(文化)신문"이라는 평가가 자리 잡게 된다.

    또 조선일보는 11월 24일부터 30일까지는 '조선박물전람회(朝鮮博物展覽會)'를 열어 청년 학생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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