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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1934년 수해(水害)때 국내 첫 항공취재 벽지(僻地) 신문 수송에도 전용기 띄워

  • 이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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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0.01.22 06:24

    1934년 7월 21일 영호남 지역에 폭우가 쏟아져 경부선 호남선 경남선 마산선 등 철도가 끊어질 정도의 큰 수해(水害)를 입었다. 조선일보는 즉각 구호금품 모집에 나서는 한편 비행기를 이용한 취재 및 지원활동에 나섰다. 당시 화제가 된 취재용 비행기는 프랑스제 살무손 2A2형으로 일본으로부터 대절한 것이었다. 조종사는 안창남의 일본 비행학교 1년 후배인 신용욱(愼鏞頊)이었다. 당시 33세이던 신용욱은 일본의 오쿠리(小栗)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해 1933년 실라헬리콥터학교 조종과를 졸업하고 막 귀국한 비행분야의 개척자였다.

    "본사는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보도의 천직을 다하기 위해 거대한 비용을 들여 최후의 수단인 비행기를 출동시키기로 결의했다."

    
	언론사상 최초로 조선일보가 구입한 취재전용 비행기 앞에 선 간부들. 왼쪽부터 편
집국장 김형원, 사회부장 이상호, 신용욱 비행사, 사장 방응모. /조선일보 DB
    언론사상 최초로 조선일보가 구입한 취재전용 비행기 앞에 선 간부들. 왼쪽부터 편 집국장 김형원, 사회부장 이상호, 신용욱 비행사, 사장 방응모. /조선일보 DB

    당시 조선일보의 사고(社告) 일부다. 사상 최초의 비행기 취재라는 조선일보의 기록은 재력을 갖춘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와 결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용욱이 모는 비행기에 탄 조선일보 촬영반은 현장상황을 공중에서 영사기로 담아 7월 26일 기록영화 형태로 서울시민에게 수재현장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그로 인해 구호품은 조선일보에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비행기는 취재뿐만 아니라 수재로 고립된 이재민들의 구호활동에도 한몫을 했다. 구호품들을 싣고 가 공중에서 투하한 것이다.

    조종사 신용욱은 그 후 조선일보 8월 11일자부터 14일자까지 4회에 걸쳐 '삼남(三南) 재지(災地) 조사(調査) 비행기(飛行記)'를 연재해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이뤄진 항공취재의 소감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조선일보사는 1935년 신년호를 통해 살무손의 구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서울 상공에서 시험비행을 벌였다. 신문사 최초로 전용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후 조선일보는 장거리 오지에 대한 신문수송에도 살무손을 투입했다. 1935년 10월 23일 조선일보 마크가 선명한 살무손의 신문수송을 위한 첫 비행을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12시 45분 대구를 비롯해 영천 경주 포항 울산 각지로 가는 신문의 싣기를 마치자 신용욱 비행사는 늠름하게 올라탔다. 1시 정각 본사 방 사장과 직원의 전송 속에 조선 신문 사상 새 이정표를 기록할 본사 비행기는 이 땅에 밝아올 새 문화의 전령답게 서서히 활주로를 이륙했다."

    한편 신용욱은 이후 조선비행학교장을 거쳐 1936년 조선항공사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항공산업에서 종사하다가 광복 후 국내 최초의 민간항공사인 대한민국항공사(KNA)를 설립하고 정계에 투신해 2·3대 의원을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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