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숨 넘어가는 판결문

    입력 : 2010.01.15 22:52 | 수정 : 2010.01.15 23:09

    '코프리노호(號)는 작은 목조 바지선을 이끌고 서녘으로 향했다. 카마나를 지났을 때 거센 바람이 불자 바다는 더이상 예전의 바다가 아니었다. 작은 바지선은 이내 가라앉고 말았지만 코프리노호는 가라앉지 않았다. 무엇이 바지선을 전복시켰을까.'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대법원 베리 데이비스 판사는 2004년 판결문을 운문(韻文)으로 써 "시적(詩的) 판결문"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1981년 대법관 이회창은 신문 기사에 충격을 받았다. 그가 대법관으로 처음 쓴 판결문을 두고 "아직도 이런 난삽한 판결문이… 국민과 소송 당사자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낱말"이라고 지적한 기사였다. 그는 부인에게 판결문을 보여줬고, 부인은 "문장이 이렇게 얽히고 꼬여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고 핀잔했다. 그는 쉽고 간결한 판결문 쓰기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2005년 국정원 비자금과 관련한 '안풍(安風)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에선 한 문장이 A4 4장분 2794자였다. 1990년 검찰의 사노맹사건 공소장에서 한 문장은 타이프용지 150장분이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공소장도 6700글자의 한 문장이었다. 국어학자들은 한 문장이 100자를 넘으면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1000자가 넘어가면 전문가 해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법원행정처가 사법 60년을 기념해 발간한 '역사 속의 사법부'에서 "1948~94년 대법원 소유권이전등기소송 판결문을 분석해보니 한 문장이 평균 394자였다"고 밝혔다. 평균 15개 문장으로 나눌 수 있는 글이 '하였고' '했으나' 같은 어미로 이어져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뜻 모를 한자어를 쓰는 관행도 여전하다. 미국 대법원은 어려운 라틴어원 단어들을 되도록 쓰지 않고 쉬운 생활언어로 판결문을 쓴다. 언론이 그대로 실어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법원도서관 홍진호 판사는 최근 법원 내부소식지에 '엣지 있는 판결문의 네 조건'으로 짧은 문장, 판결문 중간에 쟁점별 번호와 소제목 넣기, 결론을 맨 앞에 세우기, 적절한 도표와 수식 활용하기를 들었다. 그러나 한 판사는 "써야 할 판결문이 워낙 많다 보니 과거 판례 틀을 그대로 갖다 쓰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판결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보니 군말이 많아지고 글이 늘어진다는 실토도 있다. 1997년 정귀호 대법관 말처럼 업무가 과다하다는 핑계만으론 가릴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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