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이육사·원조·원창 3형제, 조선일보 기자로 일해

    입력 : 2010.01.15 03:12 | 수정 : 2010.01.15 10:48

    이원조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가 쓴 ‘말(馬)’이라는 시가 실렸다. 여기서 시인은 ‘채찍에 지친 말’이지만 새해에는 힘차게 소리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그 말은 일제 식민통치에 신음하는 조선민족이었다. 이 시를 쓴 이육사는 잠시 중외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다가 1931년 8월 조선일보에 입사한다.

    대구 시내에 항일(抗日) 격문을 뿌렸다가 검거된 바 있는 이육사는 ‘육사생(肉瀉生)’ ‘이활(李活)’ 등의 필명으로 다양한 기사를 썼고 이듬해 3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러 중국으로 떠난다. 이후 1934년 조선일보에 다시 입사했다가 퇴사하지만 기고는 1940년 폐간 때까지 이어졌다. 조선일보 폐간 후에는 자매지 ‘조광’에 수필 ‘계절의 표정’을 발표했다.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다시 건너간 이육사는 결국 북경에서 일경에 체포돼 1944년 옥사(獄死)했다.

    이육사(왼쪽)와 이원창

    ‘청포도’ ‘광야’의 시인 이육사는 6형제의 둘째로 본명은 원록(源祿)이다. 그의 형제는 첫째 원기(源祺), 셋째 원일(源一), 넷째 원조(源朝), 다섯째 원창(源昌), 여섯째 원홍(源洪)이다.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탄사건 때는 첫째부터 넷째까지 4형제가 모두 일제 경찰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이들 형제는 이육사뿐 아니라 원조와 원창도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다. 이원조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2년 연속 시와 소설로 당선하고 평론가 활동도 벌여 유명했다. 그 시절에는 육사가 ‘이원조의 중형(仲兄·둘째형)’으로 소개될 정도였다. 그는 광복 후 형의 시를 모아 ‘육사시집’을 펴냈다.

    다섯째 이원창은 인천 지국 주재기자로 활동했다. 폐간호인 1940년 8월 11일자에 실린 지방특파원 방담기사에서 이원창은 3형제가 조선일보에서 일한 데 대해 이렇게 자부했다. “기자생활 5년인데 무슨 인연인지 3형제가 본사에 관계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원창은 광복 후에도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조봉암의 비서를 지냈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