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4] 이광수·현진건·염상섭·심훈… 조선일보서 '문인(文人) 기자'로 맹활약

    입력 : 2010.01.15 03:12

    문인·학자들의 '둥지'가 되다
    괄괄한 성격의 염상섭 제목 잘 뽑았던 현진건
    5개 직책 맡았던 이광수 '신문계 무솔리니'로 불려
    1920~30년대 조선일보는' 조선 문단'의 또 다른 이름

    이광수·현진건·염상섭·김동환·심훈·이육사·김동인·채만식·백석·김기림·한설야·계용묵·노천명·윤석중….

    1920~30년대 조선일보는 조선 문단(文壇)의 다른 이름이었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한국 근대문학사에 빛나는 뛰어난 문인들이 모여들어 기자로 활동하며 식민지 민중의 애환을 달래고 우리말을 갈고 닦았다.

    염상섭(廉想涉·1897~1963)은 1921년 조선일보 3대 사장 남궁훈에 의해 편집국장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당시 일개 젊은 문사(文士)에 지나지 않았던 그를 편집국 기자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괄괄한 성격의 염상섭은 사흘 만에 사표를 던졌다. 그는 조선일보 퇴사를 전후해 문단에 화제를 뿌린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했다.

    1929년 9월 조선일보 주필 안재홍의 권유로 다시 입사한 염상섭은 1931년 1월부터 그의 대표작이 되는 소설 '삼대(三代)'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학예부장으로 일하던 그가 조선일보에 장편소설을 잇달아 연재하자 잡지 '동광' 1931년 10월호는 '조선일보의 소설은 혼자 맡아 놓았다는 듯이 톡톡히 긴 놈을 매일 발표하는 씨의 정력에 경의를 표치 아니할 수 없다'고 썼다.

    현진건·염상섭·김동환·심훈(왼쪽부터)

    현진건(玄鎭健·1900~1943)은 1921년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잡지 '개벽'에 발표한 단편소설 '빈처(貧妻)'로 주목받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이후 조선일보를 잠시 떠났다가 1926년 다시 돌아와 사회부장이 됐다. 그는 기사 제목을 잘 뽑기로 유명했다. 사회부 기자 이서구는 '붉은 잉크를 붓에 듬뿍 찍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주옥 같은 명제목을 달아 선·후배들로 하여금 그 재주에 혀를 내두르게 했다'('신문과방송' 1977년 5월호)고 회고했다. 조선일보 4대 사장 이상재가 사망했을 때 현진건이 달았던 '무궁한(無窮恨·끝없는 안타까움에) 부진루(不盡淚·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영구(靈柩)는 만년유택(萬年幽宅)에'는 명제목으로 회자됐다.

    심훈(沈熏·1901~1936)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서양 영화를 소개하고 조선 영화를 비평하는 기사를 많이 썼다. 조선에 영화가 수입된 1897년부터의 조선영화사(史)를 정리한 '조선 영화 총관'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는 소설·시·시나리오·수필·평론 등 거의 모든 분야의 글을 쓰는 전방위 문인이었으며, 1926년 이경손 감독의 '장한몽'에서 여주인공 심순애의 상대역인 이수일을 맡았던 배우이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상록수'는 조선일보가 펼쳤던 '문자 보급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을 쓴 김동환(金東煥·1901~1958)은 1929년 조선일보 종로경찰서 출입기자였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감동을 잘해 '감격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문사 편집국 창문을 통해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그가 "아!" 하고 감탄하면 학예부장 안석주는 "이크, 파인(巴人·김동환의 호)의 감격이 또 시작됐군!"하고 놀렸다. 그의 진가(眞價)는 그가 글을 쓰고 안석주가 삽화를 그린 시 작품들에서 돋보였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너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주'(조선일보 1929년 1월10일자).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이광수(李光洙·1892~1950)는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겸 취체역(이사)·편집국장·학예부장·정리부장 등 5개 직책을 동시에 맡아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감자' '배따라기' 등을 쓴 소설가 김동인은 1933년 학예부장을 지냈다. 시인 이상(李箱)과 함께 구인회에서 활동한 김기림(金起林)은 1930년 조선일보 공채 1기로 입사, 1940년 폐간 때 학예부장으로 재직하며 '바다와 나비' 같은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또 시인 백석·노천명과 소설가 계용묵은 출판국 기자, 소설가 한설야·채만식은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다.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를 무대로 활동했던 '문인 기자'들은 지금도 우리 기억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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