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글을 거의 발표하지 않았던 홍명희 '임꺽정' 연재하며 조선일보에 합류

    입력 : 2010.01.12 05:16

    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작가 벽초 홍명희.
    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작가로 유명한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1888~1968)는 신간회가 창설된 1927년 무렵부터 조선일보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임꺽정(林巨正)'이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1920년대 중반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지낸 홍명희는 남의 책 서문이나 극히 짧은 글을 청탁에 못이겨 쓴 것 외에는 글을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글을 쓸 역량을 가지고도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오늘날 조선의 각 사회를 너무 비관함이 아닌가 한다"('개벽' 1924년 2월호)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 홍명희가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함께 신간회 간부로 일하던 조선일보 사람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는 1927년 2월 열린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나 극구 사양하고 실무직에 해당하는 조직부 총무간사를 맡았다. 당시 신간회는 이상재 사장, 신석우 부사장, 안재홍 주필 등 조선일보 간부진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임꺽정'의 삽화를 그린 조선일보 학예부장 안석주는 "조선일보에 임꺽정이 실리게 될 때 벽초 선생이 주저하시는 것을 그 당시 신문사 간부 제씨가 강권하다시피 하였고, 곁쐐끼로 내가 응석같이 졸랐다"(조선일보 1937년 12월 8일)고 회고했다.

    당시는 소설을 읽기 위해 신문을 본다고 할 만큼 연재소설의 인기가 대단했다. 연재소설에 따라 신문 구독 부수가 달라질 정도였다. 동아일보는 당시 최고 인기작가였던 이광수가 잇달아 소설을 쓰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1928년 11월 17일 실린 '임꺽정' 연재 예고 기사에서 "세계적 명작 알렉산더(알렉상드르) 뒤마의 '암굴왕'보다도 더욱 그 구도가 크거니와 홍명희 선생의 필치는 오히려 뒤마류의 것보다도 훨씬 장대할 것을 미리 말씀합니다"라고 광고했다.

    1928년 11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소설‘임꺽정’첫 회. 삽화는 학예부장 안석주 가 그렸다.

    '임꺽정'은 동아일보를 긴장시켰다. 동아일보는 '임꺽정' 연재 예고가 나간 직후 이광수의 '단종애사(端宗哀史)' 연재를 예고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양대 민간지에서 문단의 양 거두가 승부를 겨루게 된 것이었다. 두 소설 중 어느 쪽이 더 인기를 끌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김을한은 "임꺽정이 연재되는 동안 조선일보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의 연재소설을 능가할 수 있었다"('한국언론인물지')고 회고했다.

    1928년 11월 21일 시작된 '임꺽정'은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한용운은 "연재기간의 연장으로는 세계적으로 최고 기록일지도 모른다"(1937년 12월 8일)고 했다.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는 1930년대 초반 조선일보 판매부장을 지냈고, 장남 홍기문은 조사부장·학예부장·논설위원 등을 거치며 1940년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조선일보와 홍명희의 관계는 1933년 방응모(方應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이후부터 더욱 깊어졌다. 홍명희는 한용운과 함께 방응모의 죽첨정 집에 자주 모여 시국을 걱정하며 술을 마시고, 셋이서 함께 황해도 배천 온천에 다녀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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