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편집국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그 중 하나가 인수 당시 중간 역할을 한 동아일보 영업국장 홍증식이 조선일보로 옮겨오면서 사회주의 성향의 기자를 대거 끌어들인 것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1922년이면 국내에도 서울청년회· 화요회· 북풍회 같은 사회주의 조직들이 속속 생겨났다. 조선일보에 들어온 사회주의 계열의 기자는 논설반의 김준연(金俊淵) 신일용(辛日鎔), 사회부의 박헌영(朴憲永) 임원근(林元根) 김단야(金丹冶), 지방부의 홍남표(洪南杓) 등이었다.
이들의 참여로 조선일보의 지면에도 좌경화된 기사들이 다수 반영됐다. '통영의 무산자여 단결하라'(1924년 10월 19일자), '일본 무산계급의 정치운동'(11월 21일자), '레닌회견 인상기'(1925년 1월 27일자), '사상단체 조선해방동맹'(4월 12일자), '돌연 적기(赤旗)를 뒤흔들고 무산자 만세를 고창(高唱)'(4월20일자) 등과 같은 기사들이 그것이다.
조선일보는 1924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1년 동안 총 88건의 기사를 압수당했다. 그 중 14%가 사회주의 관련 기사들이었다. 게다가 1925년 4월17일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자 사회주의자들은 조선일보를 기관지처럼 활용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1925년 9월 8일자 신일용의 논설 사건은 그런 움직임의 결정판이었다. 서울 정동 옛 제정(帝政)러시아 공사관 자리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사관이 부활하자 신일용은 '조선과 노국(露國)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논설을 통해 영사관 부활을 계기로 소련의 힘을 빌려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고 주장했다. 총독부는 즉각 신일용을 구속하고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무기정간 조치를 내렸다. 조선일보의 3차 정간이었다.
정간의 장기화로 다시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에 대해 총독부는 정간 해제 조건으로 사회주의 계열 기자들이 대거 포함된 17명의 기자를 해임할 것을 요구했다. 논란 끝에 이들은 대부분 조선일보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