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2] 조선일보 인수해 혁신시킨 신석우 임시정부 때는 '대한민국' 국호(國號) 정해

    입력 : 2010.01.08 03:21 | 수정 : 2010.01.08 04:23

    제5대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신석우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여가 지난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는 현순(玄楯)의 집에 이동녕·이시영 등 독립운동가 29명이 모여 망명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국회)을 구성했다. 이동녕 의장 주재로 열린 첫 회의에서 국호(國號)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일본 유학생 출신인 26살 청년 신석우가 먼저 "'대한(大韓)'이 어떠냐"고 발의했다. 이에 대해 여운형(呂運亨·1886~1947)이 "대한은 조선왕조 말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할 필요가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일본에 빼앗긴 나라이름이므로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더불어 공화제에 해당하는 '민국(民國)'을 덧붙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의정원 의원 다수가 신석우의 제안에 공감하면서 임시정부의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오늘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이란 국호 탄생의 주역인 신석우는 이후 임시정부 교통총장(장관)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일본 관헌에 체포돼 조선으로 압송됐다. 옥고(獄苦)를 치르고 1924년 초 석방된 뒤 구미(歐美)지역으로 나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려던 신석우를 아버지 신태휴(申泰休)가 붙잡았다.

    "내가 죽을 때까지만 집에 있어라. 그 대신 조선에서 무슨 사업을 하든지 자금은 대 주마."

    의정부 대지주로 구한말 한성부 경무사(警務使·오늘날 서울경찰청장)를 지냈던 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을 신석우는 뿌리칠 수 없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신석우에게 주변에서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의 인수를 권했다. 신석우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을 팔아 조선일보 경영권을 사들였다. 당시 돈 8만5000원으로 쌀 4300가마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1924년 9월 민족지도자 이상재를 사장으로 모시고 부사장으로 경영을 담당했던 신석우는 1927년 3월부터 직접 사장을 맡아 '민족지 조선일보'의 명성을 확고히 다졌다. 하지만 신석우는 7년 가까이 조선일보를 경영하며 당시 돈 42만원이라는 거금을 쏟아부었는데도 재정난에 시달렸다. 조선일보 인수 5주년을 맞아 1929년 9월 잡지 '삼천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신석우는 조선일보 경영자로서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조선의 신문이란 돈 잡아먹는 불가사리와 같아서 누구나 섣부르게 덤비지 못할 것이요, 신문사 사장이란 욕과 고생은 많을지언정 외국의 신문사 사장과 같이 결코 영예스러운 자리는 못 되는 것이요."

    결국 1931년 7월 신석우는 조선일보 사장직을 안재홍에게 물려주고 상하이로 떠났다. 그는 광복 후 귀국해 초대 주(駐)자유중국 대사를 지냈고, 1953년 세상을 떠나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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