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100년 전 신문에 기록된 '자랑스러운 역사'

입력 2009.12.31 22:31 | 수정 2010.01.01 03:34

박정훈 사회정책부장

"일본이 남의 나라보고 합하자고 소리치는데, 반쯤 죽은 뱀(한국)을 삼켰다가 오장(五臟)에서 독을 뿜으면 (일본의) 배가 터지리라."

100년 전, 대한매일신보에 이런 독설조(調)의 기사가 실렸다. 강제병합이 초읽기에 들어간 망국(亡國)의 전야(前夜), 1909년을 마감하는 12월 29일자 신문이었다. 나라가 망하고, 일제 탄압이 본격화된 속에서도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독설을 퍼부을 수 있는 기개가 나는 놀라웠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앞둔 100년 전 오늘, 대한제국의 새해는 음울했다. 그러나 당시 신문을 읽다가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됐다. 힘과 무력으로는 어쩔 수 없던 망국의 흐름 속에서도 민족혼만큼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 강국의 명칭은 얻었으나 외면상(外面上)일 뿐이오, 한국은 4000여년 역사가 있는 세계에 유명한 오랜 나라로, 애국지사가 편만(遍滿)하였으니 어찌 일본에 합병당함을 달게 여기리오."

민족주의 신문 대한매일신보의 1909년 송년호(12월 30일자)는 일제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기가 꺾이기는커녕, 민족적 자긍심을 한껏 드러내고, 문화적으로 일본보다 한 수 위라는 우월감마저 감추지 않고 있다.

100년 전 선대(先代)의 민족정신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이상으로 강렬했다. 신문을 읽어갈수록 머리를 곧추세우고, 혼과 정신으로 저항했던 선대들이 눈물 날 만큼 고맙다. 나는 역사를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대한매일신보 읽히기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늘 일본의 선진(先進)이었고 한국 문명이 일본에 비해 상등(上等)이었거늘, 근래 서양문명을 수입하여 실력을 향상하는 데서 일시 뒤진 고로 이같이 천양지판이 되었으나 전래하는 옛 문명은 오히려 일본을 덮을진대…."

이렇게 이어지는 12월 28일자 사설은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참으로 명문(名文)이다.

"그대네(일본)가 아무리 욕심을 채우고자 하여도 한국은 결단코 멸망하지 않으리라. 일시 무력으로 한국을 합병할지라도 한국 인민은 결코 일본에 노예 되기를 달게 여기지 않을지니, 오호라 일본인들아 이런 형편은 생각지 못하고 방자하게 총독부를 세운다고 자랑하는가."

강제병합이 목전(目前)에 닥쳤지만, 저항은 더욱 가열차게 벌어지고 있었다. 신문엔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거나 의병장이 처형당했다는 뉴스가 거의 매일같이 등장하고 있다.

이해 연말(12월 22일)엔 스물세 살 청년 이재명이 총리대신 이완용을 급습하는 사건도 있었다. 신문은 이완용을 "러시아에 붙었다가 일본에 붙었다가 하는 박쥐"(12월 24일)로 묘사하고 "청나라 신문은 이완용이 칼 맞은 것을 상쾌하게 여기는 모양이더라"(12월 29일)고 통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완용 피격은 매국 진영을 꽤 겁먹게 한 모양이다. 12월 25일자 신문은 탁지대신 고영희가 "대단히 두려워하여 친척과 친한 친구 외에는 접견치 않고 안방에 있으면서 엄밀히 단속한다더라"고 전했다. 매국 단체 일진회가 망년회 때 일본 헌병 수십명의 삼엄한 보호를 청했다는 기사엔 '보호도 많다'고 비아냥거리는 제목까지 달아 놓았다.

100년 전 선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당당했고 꼿꼿했다.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은 새해 첫날, 우리는 나라 잃은 치욕에만 떨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일제의 민족말살을 이겨내고, 일본의 턱밑까지 추격할 수 있었던 자랑스러운 해답이 100년 전 신문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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