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잘못 만난 건 사랑만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 이한수 기자
    입력 2009.12.30 03:28

    '文人 김우진' 재조명한 연구서 출간
    29세에 연인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
    생전 "이광수流 문학 매장하라" 비판… 계몽주의·민족 넘어 '시민 문학' 눈떠

    "3일 오후 11시에 하관(下關·시모노세키)을 출범한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이 4일 오전 4시경 대마도 앞바다를 항행(航行)하는 도중 돌연히 갑판 위 난간에서 몸을 바다 쪽으로 투신한 일등선객의 양장미인(洋裝美人)과 청년신사(靑年紳士)가 있었는바… (남자는) 목포 부호 김모의 아들 김우진(金祐鎭)으로 판명되고 그 여자는 조선 악단(樂壇)의 총아(寵兒) 윤심덕(尹心悳)으로 판명되었다."

    1926년 8월 5일자 조선일보는 '미성(美聲)의 주인(主人) 윤심덕 양, 청년문사(文士)와 투신정사(情死)'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 유학생 출신 문인 김우진(1897~1926)과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1897~1926)의 현해탄 투신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다. 젊은 엘리트 남녀의 동반 자살은 이후 조선의 모든 신문에서 거의 열흘에 걸쳐 후속 보도가 이어질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동반자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26년 8월 5일자.
    스물아홉 살 젊은 나이에 죽음을 선택한 수산(水山) 김우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 아니라 여자 문제로 삶을 마감한 비겁한 지식인, 혹은 애잔한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으로 덧칠되면서 뛰어난 극예술 작가이자 이론가로서의 면모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윤진현(41) 인하대 한국학과 박사후연구원은 최근 출간한 《조선 시민극의 구상과 탈계몽의 미학: 수산 김우진의 생애와 문학》(창비)에서 김우진의 삶과 문학세계를 그가 남긴 작품과 일기 자료 등을 통해 꼼꼼히 복원한다.

    1924년 일본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한 김우진은 도쿄 유학생들이 조직한 극예술협회의 좌장이었고, 1920년대 연극의 주도적 흐름을 만들어낸 '동우회 순회극단'의 예술감독으로 기대를 한몸에 받은 지식인이었다. 윤 연구원은 김우진의 문학적 성장을 10대 후반~20대의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지속된 일본 유학 생활에서 찾는다. 김우진은 열여덟 살이던 1915년 구마모토(熊本) 농업학교를 시작으로 1924년 와세다대 졸업 때까지 10년간 일본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잠시 꽃핀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기였다.

    김우진은 다이쇼 시대 개인의 자아실현을 목표로 삼았던 시라카바(白樺)파 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희곡 〈정오〉 〈이영녀〉 〈두데기 시인의 환멸〉 등에서 사회적 억압과 통제의 현실을 폭로하고, 인습과 도덕을 극복한 초월적 개인을 형상화하면서 '자유로운 개인'이자 '공적 인격체'인 '시민'을 발견한다.

    김우진의 '시민 문학'은 계몽주의 문학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상황에서 선구적인 것이었다고 윤 연구원은 평가한다. 그는 1926년 쓴 평론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 이광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우진은 "조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오, 미문(美文)이 아니오, 재화(才華)가 아니오, 백과사전이 아니다"라면서 "거칠더라도 생명의 속을 파고드는 생명력, 한 곳 땅을 파면서 통곡하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고 일갈했다.

    윤진현 연구원은 "김우진은 당대 주류를 이뤘던 계몽적 문학관을 통렬히 비판하고 근대 극복의 인간형을 제시했다"며 "그의 문학은 민족적 차원, 조선 독립의 과제를 넘어 세계 시민권을 향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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