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들은 올해 개봉한 영화들 중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주연의 '그랜 토리노'를 '관객이 외면한 최고의 영화'로, '여고괴담 5: 동반자살'을 '관객이 몰린 최악의 영화'로 꼽았다. 조선일보는 최근 영화평론가 10명에게 "올해 1월 1일부터 현재까지 개봉한 영화 중 '흥행성적이 50만명 미만인 최고의 영화 5편'과 '50만명 이상인 최악의 영화 5편'을 꼽아 달라고 요청했다. 개봉영화 리스트와 흥행성적은 영화진흥위원회 홈페이지에 공개된 자료 중 올 12월 17일까지 성적을 기준으로 삼았다. 응답자에 따라 1편 더 꼽거나 덜 꼽은 경우도 있었다.
◆관객이 외면한 명작
평론가들 절반 이상이 '최고의 영화'로 꼽은 '그랜 토리노', '파주',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모두 드라마가 강하고 인간 본성을 조명한 작품이었다. 이 밖에도 수작(秀作)으로 꼽힌 영화들은 대개 스토리가 뛰어난 작품들이었다.
관객 13만5000명을 조금 넘긴 '그랜 토리노'는 10명 중 7명이 꼽아 단연 '관객이 외면한 명작' 1위에 올랐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적 유언장(최광희)", "한 줄의 대사나 장면도 허투루 버려지는 법이 없다(장병원)", "장엄한 휴머니즘(이동진)", "노 거장 자기 해체의 완결적 텍스트(전찬일)"라는 찬사를 받았다.
2위는 박찬옥 감독의 '파주'. "억압된 사람들의 슬픔. 너무 박한 대접을 받았다(김영진)", "올 한 해 가장 빛나는 영화(오동진)", "지식인의 나약함과 허상, 비밀을 송두리째 발가벗긴 역작(정지욱)", "삶이라는 미스터리와 사랑이란 히스테리를 실어 나르는 잔상과 이명(이동진)"이란 평이었다.
홍상수 감독의 9번째 장편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5표를 얻어 3위였다. "허허실실 유연해진 체위 속 더 강렬해진 독설의 암시(강유정)", "제2막에 접어든 홍상수 영화의 진경(김영진)", "자신의 영화언어에 대한 흐트러짐 없는 추구(장병원)", "홍상수는 여전히 관객들이 잘 모르는 감독(이상용)"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관객 1만7000여명에 불과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는 4표를 얻었다. "오즈 야스지로도 감탄할 만한 가족의 풍경화(최광희)", "올해 단 한편만 꼽는다면!(이동진)", "가족관계의 상투적 연민을 벗어던지게 하는 놀라운 통찰(김영진)"이라는 찬사였다.
미국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으나 국내 성적이 좋지 않았던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액션 오락영화 중 유일하게 꼽혔다. "올해 최고의 오락영화(이동진)", "매력적인 악당 창조에 공헌한 바를 높이 삼(김영진)", "스타일로 중무장하고 밀어붙이는 솜씨만으로도(이상용)" 등의 평이었다. 이 밖에 2명 이상이 꼽은 최고의 영화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불신지옥', '여배우들'이었다. '더 리더'는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중후하고 깊이 있는 성찰(최광희)", "관객들이 10대 소년과 30대 여자의 섹스를 겁낸 걸까?(오동진)"라는 평을, '불신지옥'은 "이 불온한 대한민국을 종교의 언어로 직시하다(강유정)", '여배우들'은 "속 깊은 수다는 언제나 즐겁다(황희연)"라는 평을 받았다.
1표를 얻은 작품들의 단평(短評)은 더욱 강렬했다. 불과 552명 관객을 동원한 영화 '장례식의 멤버'를 꼽은 이상용 평론가는 "백승빈 감독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신인이다. 두 번째 장편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했다. 양익준 감독을 스타 반열에 올린 '똥파리'를 꼽은 이동진 평론가는 "강렬한 파토스와 가공할 화력의 드라마"라고 했다.
◆관객이 몰린 졸작
악평(惡評)은 창작자의 신경을 건드리지만 동의하는 독자에겐 쾌감을 준다. 평론가들은 기명(記名) 악평을 아예 생략하기도 했으나, 날 선 비판도 꽤 나왔다.
'여고괴담 5: 동반자살'의 성적은 65만명으로 적은 편이었으나 '50만명 기준'과 평론가 5명이 꼽은 탓에 '관객이 몰린 최악의 영화로 꼽혔다. "엉성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천덕꾸러기 시리즈(장병원)", "너무 안일하게 만들어진 프랜차이즈 영화(황희연)"란 평이었다.
한국영화 3편과 미국영화 1편이 각각 4표씩 얻어 공동 2위였다. 214만명이 몰린 '내사랑 내곁에'를 졸작으로 꼽은 사람들은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 가학·피학적 영화(전찬일)", "상상력의 고갈(김영진)" 등으로 평했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에는 "불꽃은 희미하고 나비의 날갯짓은 둔탁하다(최광희)"라는 평이, '유감스러운 도시'에는 "유감스러운 명절용 영화(이상용)"라는 평이 따라왔다. 743만명을 동원한 블록버스터 '트랜스포머 2: 패자의 역습'은 "변신합체 로봇과 스포츠카, 레이싱 걸을 갖고 싶은 남성들을 위한 3종 로망세트(최광희)"라는 평이었다.
뱀파이어와 하이틴 로맨스를 합쳐 인기를 끈 '뉴 문'은 "데이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러 간 남성 고문용 여성 판타지(강유정)"라는 평을, '닌자 어쌔신'은 "월드스타 비가 외국 파병 나갔다 온 듯한 인상(오동진)", "친구가 수모를 당하고 있을 때 느껴지는 이상한 굴욕감의 체험(강유정)"이란 평을 받으며 각각 3표를 얻었다.
이 밖에도 "롤랜드 에머리히는 끝까지 지구를 때려 부수기만 할 것이다(2012·김영진)", "애국심 마케팅으로 일관한 애국신파 드라마(국가대표·정지욱)", "이런 80년대 멜로로는 국내 팬도 사로잡기 어렵다(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황희연)"라는 평들이 2표씩 얻은 영화들에 주어졌다.
1표씩 얻은 영화들에 평론가의 취향이 강하게 작용한 듯했다. 올해 최고의 히트작 '해운대'는 "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세대별 눈물 짜기 작전(최광희)"이란 평을, 부산영화제 개막작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톡 쏘는 유머와 매서운 풍자를 뺀 장진 코미디는 시시하다(장병원)"는 평을 얻었다.
▶설문에 응답해주신 평론가들: 강유정 김영진 오동진 이동진 이상용 장병원 전찬일 정지욱 최광희 황희연(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