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야기] "크리스마스 실(seal), 내 손 안에 있소"

조선일보
  • 박순찬 기자
    입력 2009.12.22 03:05 | 수정 2009.12.22 07:50

    1932년부터 발행 1만여장 모두 소장한 남상욱씨

    "국내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seal)입니다. 자세히 보면 초판(初版)은 진한 녹색인데, 재판(再版)은 색깔이 좀 연하죠? 세계 최초의 실은 1904년 덴마크에서 나왔는데…."

    남상욱(南相旭·61·윤영방재엔지니어링 대표)씨의 눈빛이 형형했다. 21일 오후 서울 반포동 자택에서 만난 남씨는 수천 장의 크리스마스 실을 모아놓은 앨범 여섯 권을 들여다보며 감상 삼매(三昧)에 빠진 듯했다.

    7년 동안 크리스마스 실을 수집해 온 남상욱씨가 21일 오후 서울 반포동 자택에서 자 신이 모아온 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남씨는 크리스마스 실 전문 수집가다. 결핵퇴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하는 실은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 우편물과 소포에 붙여 나눔을 실천하는 상징이다. 실을 발행하는 대한결핵협회 관계자들조차 "우리보다 더 많은 종류의 실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는 1932년 발행된 한국 최초의 실부터 올해까지 국내에서 발행된 모든 실을 소장하고 있다. 낱장이나 25~50장짜리 전지(全紙)는 기본이고, 실 도안이 들어간 전화카드나 포스터, 연하장까지 다양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취미는 우표 수집이었다. 2002년부터 한두 장씩 실을 모았지만 심심풀이 정도였다. 2006년 일본계 미국인 스테판 하세가와(Hasegawa)씨가 펴낸 실 도감(圖鑑)을 접하며 그의 마음에서 뜨거운 것이 확 솟구쳤다. 1932~40년까지 국내에서 발행된 실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한 책이었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우리나라 실의 역사까지 외국인의 손에 맡겨져 있는 사실에 비분강개(悲憤慷慨)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실 수집에 나선 남씨는 주말마다 서울 회현동 지하상가의 우표상을 훑었다. 외국 경매 사이트도 숱하게 드나들며 매물로 나온 한국 실을 모았다. 국내에 변변한 수집가가 없어 상당수의 실이 외국인 수집가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남씨는 "우표에 비해 실은 서자(庶子) 취급을 받았다"며 "그 흔한 인터넷 동호회 카페조차 없다"고 했다.

    그가 모은 실은 현재 1만여장을 넘는다. 쏟아부은 돈이 5000여만원에 달한다. 단순한 수집에 그치지 않고 실의 역사와 의미를 꼼꼼히 기록하는 남씨는 매년 발행되는 실의 도안에 일정한 흐름이 있다고 했다.

    "일제 시대에는 제기차기나 널뛰기, 그네타기 같은 민속적인 도안이 많았죠. 해방 이후엔 동식물이나 별자리 등 다양한 주제가 나왔죠. 최근에는 우주인 이소연씨(2008년)나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2009년) 등 화제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지난해 가을 희귀 실 포스터의 경매에 얽힌 이야기를 했다. 1938년 청년 시절의 운보 김기창 화백이 도안했던 실 포스터가 나온 경매였다. 남씨는 "운보 선생이 1937·1938년 실을 도안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미술계에서도 드물 것"이라고 했다. 그는 1937년 운보의 실 포스터를 소장하고 있다.

    남씨는 2013년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대한결핵협회가 창립 60주년을 맞는 해다. 그는 그동안 수집한 실을 모아 '대한민국 실의 발자취'란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그가 소장한 실 중 최고가(最高價) 품목은 1936년 발행된 120장짜리 '국내 최초 발행 실'의 '재판' 전지다. 시가로 따지면 500여만원에 달한다.

    "작은 종잇조각에 수백만원을 쓰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 할지 몰라도, 저는 나름의 애국(愛國)을 하는 겁니다. 외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실, 이건 결국 잊힌 우리 역사의 한 조각 아닙니까."

    1932년부터 발행한 1만여장의 크리스마스 실을 소장한 남상욱(61.윤영방재엔지니어링대표)씨. 21일 오후 서울 반포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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