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석 스포츠부 차장대우

한국 육상 멀리뛰기와 세단뛰기 코치인 랜디 헌팅턴(55)은 얼마 전 기자와 만나 "미국에 가서 겨울옷을 가져와야 한다"고 푸념했다. "비행기 티켓 값이면 옷을 사고도 남을 텐데 무슨 소리냐"고 하자 랜디는 자기 손을 펴 보였다. 랜디는 키도 1m88로 장신이지만 손이 유별나게 컸다. 기자의 얼굴을 완전히 가릴 정도였다. 그는 "한국에서는 내 손에 맞는 장갑도 못 산다"고 했다. 발 사이즈도 290㎜인 그는 신발 살 곳부터가 마땅치 않다고 했다.

한국 육상에는 지난 5월부터 5명의 외국인 코치가 활동했다. 이들의 타국살이는 이렇게 고달프다. 통역을 빼고 나면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다. 한 외국인 코치는 "호텔에서 수개월을 머무는 것도 고역"이라고 했다. "일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죠. 우리한테는 집(home)이 없어요. 잠을 자는 곳(호텔)만 있죠."

그러나 이들의 진짜 외로움은 다른 곳에 있다. 이들은 '철밥통 한국 육상계'로부터도 고립돼 있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외국 지도자 영입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외국 코치들과 어떤 논의도 하지 않으려 든다. 밥그릇을 빼앗아 간 적으로 보는 탓이다. 더 큰 문제는 일부 한국인 지도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외국 코치들과 선수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는 점이다. 외국 코치들은 자기들끼리의 은어로 이런 한국 지도자들을 '유령(ghost)'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유령들의 신통력을 보고 싶다면 한국 대표 선수단이 출전한 국제 대회를 관찰하면 된다. 이곳에서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멀쩡하던 선수가 경기를 앞두고 느닷없이 두통을 호소하며 훈련에 빠진다. 이럴 때는 대표 감독이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다. 평소 잘 뛰던 어떤 선수는 갑자기 아프다며 레이스를 중도 포기해 버린다. 한국인 대표팀 감독이 "A프로그램으로 훈련하라"고 지시해 놓으면 B프로그램으로 훈련하는 선수도 있다. 한국 육상계 선배 지도자에 대한 태도가 이 정도니 외국인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다. 어둠 속의 그들은 "국제대회 나가서 힘 빼지 말고 전국체전이나 잘 뛰라"는 국제전화 한 통으로 멀쩡하던 선수가 아프도록 만들 수 있다.

육상연맹과의 재계약에 실패해 16일 한국을 떠난 자메이카 출신 단거리 코치 리오 알만도 브라운(53)도 이런 일을 겪었다. 그는 기자에게 "선수가 단독으로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우리와 선수 사이에 누군가가 있다. 다만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 역시 '유령'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아마추어 스포츠 종목에서는 각 팀이 어떻게든 국가대표에 선수를 밀어넣으려고 다툼을 벌인다. 이것이 정상이다. 희한하게도 육상은 어떻게든 대표팀에서 빠져나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편안한 국내 경쟁만 하면 그뿐인데 왜 힘을 빼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문제는 육상경기연맹이다. 대표 차출을 기피하는 선수나 팀에 대해서 강력한 징계를 내려야 하는데, 지금껏 선수와 소속팀의 눈치만 봤다. 만일 육상연맹이 태업하는 선수를 대표팀에서 과감하게 퇴출시키고, 국내 대회 출전자격까지 박탈하는 강경 조치를 취한다면 가당찮은 유령놀이는 뿌리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육상은 그런 선수나 지도자들이 없어도 발전할 수 있다. 오히려 더 건강해질 수 있다. 지금 한국 육상은 100m에서 남녀 한국기록과 타이기록을 세워도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B기준기록(육상 후진국을 위해 특별히 완화된 기준 기록)을 통과 못하는 수준이다. 100m 한국기록을 약간 경신해 봤자 자격 미달로 세계선수권에도 못 나간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