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비가 내렸다. 낮게 깔린 먹구름 아래 콘크리트 건물 외벽이 습한 잿빛으로 번들거렸다. 10일 오후 3시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키 173㎝, 체중 83㎏의 다부진 사내가 민원실 앞에서 담뱃불을 댕겼다. 올 1월 연쇄살인마 강호순(39)을 검거한 안산 상록경찰서 강력계 한춘식(39) 경위였다.
강은 지난 7월 사형이 확정됐다. 한 경위는 이날 강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를 찾았다. 강이 구치소에 들어온 뒤 세 번째 방문이다. 앞서 두 번의 만남은 3월과 9월에 이뤄졌다. 수사 목적의 접견이었다. 3월 접견은 여죄를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2004년 충청북도에서 실종됐던 여성이 유골로 발견되자, 충북지방경찰청이 "강의 소행이 아닌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해온 것이다. 당시 강은 한 경위와 마주 앉아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건 스타킹이 없잖아요. 내가 한 건 스타킹이 있는데…. 어디서든 스타킹이 목에 묶여 있는 여자 시체가 나오면 나한테 들고 오십쇼."
9월 접견은 목적이 좀 달랐다. 안산 상록서 주차장에 방치된 강의 무쏘 차량을 폐차하려고 강에게 소유권 포기 각서를 받기 위해서였다.
한 경위는 "강이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다 저를 보더니 고개를 반쯤 뒤로 젖히며 씩 웃었다"고 했다. "3월보다 좀 마른 것 같았어요. 검거 당시 강은 키 171㎝, 체중 70㎏이었어요. 몸이 탄탄했죠. 9월에 갔을 땐, 190㎝가 넘는 교도관을 따라 들어와서 그런지 전보다 왜소해 보였어요. 5㎏쯤 줄어든 것 같았지요."
그러나 싱글거리는 것은 똑같았다. 한 경위가 "잘 지내느냐"고 물었다. 강이 피식 웃었다. "여기서 잘 있을 게 뭐 있어요?"
한 경위가 "무쏘를 폐차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강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어차피 앞으론 탈 일도 없을 텐데…. 그러십쇼."
강이 소유권 포기 각서에 지장을 찍었다. 서류를 챙겨 나가던 한 경위가 마지막으로 강에게 물었다. "뭐 필요한 것은 없냐?" 강은 빙글거리며 "초코파이가 먹고 싶다"고 했다. 한 경위는 구치소를 나서며 3만원을 영치금으로 넣었다. 한 경위는 "그때만 해도 강은 두려움도, 죄책감도 없는 인간 같았다"고 했다.
구치소 직원은 "요즘은 좀 다르다"며 "강이 심리적으로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최근 같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연쇄살인범 정남규가 사형에 대한 압박감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 한 경위는 "정남규가 죽은 뒤 강이 비로소 '나 역시 언제든 형이 집행될 수 있는 사형수'라는 것을 실감한 것 같다"고 했다.
강의 첫 희생자는 2005년 자택에서 방화로 질식사한 강의 네 번째 부인과 장모다. 강은 2006년 9월 정선군청 여직원(당시 23세)을 해친 것을 시작으로 2년여에 걸쳐 8명을 납치·살해했다. 이 중 7명이 경기도 서남부에서 변을 당했다.
수사팀을 지휘한 경기지방경찰청 김동락(46) 광역수사대장은 "2007년부터 수원·화성·안산 등지에서 부녀자가 연쇄 실종돼 정예 요원 12~13명이 10개월 가까이 매달렸지만 잡지 못했다"며 "수사본부를 축소한 뒤에도 사무실에 실종자 명단과 지도를 붙여놓고 늘 '누굴까' 고심했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군포에서 마지막 희생자(당시 21세)가 실종됐다. 다시 수사에 불이 붙었다. 이후 검거되기까지 과정은 보도된 대로다. 김 대장은 "강은 증거를 들이댄 사건만 실토했다"며 "희생자가 더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이 지금도 든다"고 했다.
강을 검거한 한춘식 경위도 동의했다. 한 경위는 "강을 검찰에 송치하기 전날 '이제 마지막이니까 남은 게 있으면 다 털어놓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피식 웃더니 '한 형사님, 제가 입 연 다음에 뭐 숨긴 게 있나요? 이제 없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경찰이 밝힌 강의 희생자는 경기도 서남부 일대 7명뿐이었다. 불과 보름 뒤 검찰 추가 수사를 통해 정선군청 여직원 살해 사건도 강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 경위는 지난 3월 강을 접견할 때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추궁했다. 강은 또다시 피식 웃었다.
"그때는 증거가 없었잖아요. 저도 '언젠가는 (시신을) 찾아줘야지' 싶었는데, 검찰이 증거를 가져왔기에 털어놨어요."
한 경위는 "새삼 강호순의 뻔뻔함에 기가 막혔다"고 했다.
"경찰에 붙잡혀 온 범죄자들은 다들 경찰 무서운 줄을 알아요. 큰소리를 쳐도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죠. 강은 달랐어요. 수사망이 좁혀들어도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계속했고, 붙잡혔을 때도 당황하거나 반항하지 않았어요."
강은 1월 24일 근무하던 마사지숍에서 검거됐다. 한 경위는 "집이 비어 있기에 강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러봤다"며 "설마 받을까 싶었는데 강이 침착하게 '지금 근무 중'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한 경위가 마사지숍 앞으로 불러내 수갑을 채웠을 때도 고분고분했다.
강은 나중에 경찰 조사에서 "허수아비 같은 경찰이 날 잡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검거되기 전에 내 축사 주변에서도 야산 수색 작업이 벌어지기에 '시신 있는 위치를 가르쳐 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도 했다. 피의자가 경찰 앞에 앉아 서슴없이 경찰을 조롱한 것이다. 수사 진척이 느리다고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은 일선 형사가 강 앞에서 짜증을 내자, 강은 빙글거리며 "애먼 사람(강 자신)한테 화내지 말고, 그놈(상사)을 여기 데려오면 내가 스타킹으로 목을 졸라주겠다"고 했다.
구치소로 넘어간 뒤에도 강의 태도는 변함없었다고 한다. 서울구치소 관계자는 "강은 구치소에서도 밥 한 끼 거르는 일 없이 꼬박꼬박 먹고, 운동시간마다 방 밖으로 나와 성실하게 운동한다"고 했다. 또 다른 교정당국 관계자는 "강이 다른 재소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위엄'을 부리며 왕처럼 지낸다고 들었다"고 했다.
한 경위는 "강이 관심을 갖는 것은 강 자신과 돈밖에 없는 것 같았다"고 했다. 강은 범행 대상을 물색하던 중에도 돈을 쓰면 반드시 현금영수증을 받았다. 경찰은 강이 받은 현금영수증 기록을 추적해 강의 행적을 재구성했다. 경찰조사에서 강은 "세금을 환급받으려고 그랬다"고 했다.
강의 두 아들은 친척집을 전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가족들도 정신적 공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다. 한 경위는 "강이 가족을 챙기는 것도 '위장'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경찰 조사 도중 강은 가족에게 전화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어도 하지 않았다. 한 경위는 "자식들을 염려하는 척했지만, 실제로 교사들 말을 들어보면 용돈만 쥐여주고 방치하다시피 키운 것 같다"고 했다.
"사람이라면 남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강호순은 100% 자기밖에 모릅니다. 돌이켜보면 그게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아닐까요. 강력계 형사 10년 하는 동안 칼로 28차례 사람을 찌른 범인, 30차례 이상 연쇄 성폭행을 저지른 범인 등을 두루 봤어요. 그들도 잡혀오면 미안한 척합니다. 현장 검증을 할 때는 떨기도 하고요. 강은 시늉으로도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았어요."
10일, 강은 한 경위의 면회를 거부했다. 한 경위가 나지막이 혀를 차고 돌아섰다.
"죄 없는 사람 10명을 죽이고도 태연하더니, 자기 죽는 일 앞에서야 '사람'같이 구네요. 강한테, 연말이라 제가 얼굴이나 한번 보러 왔었다고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