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논설실장

"달러는 우리(미국) 통화지만, 당신들이 풀어야 할 문제야."

국제 금융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발언 중 하나는 존 코널리(Connally) 미국 재무부 장관이 1971년에 내뱉었다. 무역 적자가 쌓여 달러 가치가 하락하는 책임을 그는 독일·일본에 떠넘겼다. 달러 무죄(無罪)론을 앞세워 미국은 당시 주요 국가와 환율을 강압적으로 조정했다. 코널리의 떠넘기기 발언에서 2년 만에 1차 오일 쇼크가 발생했다. 석유값 폭등에 온 세계가 침체에 빠졌지만, 달러를 살포했던 미국이 '내 탓이오'라는 반성문을 쓴 적은 없다.

경제 전쟁의 와중에서 상대방에게 오물을 먼저 끼얹고 보는 전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리먼 쇼크로 벼랑 끝에 몰리던 1년 전에는 많은 나라가 손잡고 함께 고난을 넘기려는 동지 의식이 강했다. 하지만 암흑 터널에서 벗어나는 지금은 출구에서 먼저 도망치려는 계산만 작동하고 있다. 호주·이스라엘이 금리를 올리더니 유럽은 재정 지출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다. 들어갈 때는 같은 문으로 어깨동무하고서 갔으나 나올 때는 다른 문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꼴이다. 입구보다는 출구에서 아귀다툼 벌였던 것이 국제 공조(共助)의 역사다.

1985년 플라자 합의 때도 그랬다. 5대 경제 강국끼리 뭉쳐 위기를 이겨내자는 합의가 뉴욕에서 이루어졌다. 경제 정책을 서로 감시하는 체제까지 만들었다. 미국 압력에 진저리를 내던 독일은 그러나 어깨동무에서 빠져나가 독자 노선을 걸었다. 2년 후 가을 어느 월요일(Black Monday) 전 세계 주가는 폭락했다. 국제 공조에서 독일이 발을 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난 9월 피츠버그에서 20개국 대통령·총리들(G20)은 웃으며 단체사진을 찍고 엇비슷한 합의를 했다. 이번에도 독일은 다른 길을 걷겠다는 뜻을 감추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어느 나라가 단체 행군에서 빠졌는지 경제 정책을 감시하자는 주장에 독일은 끝까지 반대하다가 합의문에는 마지못해 서명했다. 석달이 지난 요즘 독일을 비롯한 유로 국가들이 슬슬 옆길로 새려는 조짐이다. 내년 6월 캐나다 G20 회담에서 함께 출구전략을 마련해 보자던 합의에 금이 가고 있다. "혼자 살겠다고 배신하나"라고 욕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 IMF가 눈을 퍼렇게 뜨고 감시한들 무슨 권한으로 이탈자를 단속할 수 있는가.

어느 나라 정치인이든 국내 정치와 선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지구 위의 모든 나라는 역사상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에 빠져 있다. 돈이 요즘처럼 헤프고, 주요 국가의 이자율이 이처럼 동시에 낮았던 적은 인류 역사상 없었다. 지폐에 붙은 가격표가 가장 싼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저금리 시대는 언제나 대폭발을 유발했고 패권(覇權)의 교체를 낳았다. 이탈리아 제노바를 비롯한 주요 도시 국가의 금리가 0% 쪽으로 다가갔던 시기는 1611년부터 10여년간의 일이었다. 결국 버블이 붕괴했고 유럽 경제의 주도권은 17세기 후반기부터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네덜란드도 18세기 후반 초저금리 시대를 겪은 후 영국에 패권을 넘겼고, 다시 1세기가 지나 영국이 미국에 밀리기 전에도 저금리 시대를 통과했다. 저금리 정책이란 수퍼마켓 입구에 쌓인 티슈처럼 돈이 할인 판매되는 '화폐 바겐세일'과 다를 게 없다. 한국이 고환율을 지키는 정책이나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는 정책도 화폐 바겐세일이다.

2년여 전부터 많은 나라가 화폐 바겐세일 경쟁을 벌인 끝에 지금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다. 패권의 교체 시기가 10년 후쯤이 아니라면 20년 후일까 30년 후일까 알 수 없는 데다, 또 하나의 버블이 일어났다가 다시 폭발하리라는 예언에 모두 불안하다. 이것이 출구에서 하나 둘씩 슬쩍 갓길로 빠지는 이유다.

한국도 허울 좋은 국제 공조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G20 정상회담 의장국이라서 먼저 어깨동무를 풀고 뛰쳐나갈 수 없다는 명분에 끌려갈 일은 아니다. 정부는 새해 성장률을 5% 안팎으로 높일 움직임이고, 한국은행은 물가 안정목표를 당초 최고 3.5%에서 4%로 올렸다. 가장 빨리 회복됐다고 자랑하지만, 성장률이 0% 안팎에서 5%로 돌연 뛰면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버블을 잉태할 속도다. 지방선거를 겨냥, 내년 상반기까지 재정 지출을 계속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최악의 위기 때 선택했던 정책을 미련하게 고집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0.5% 금리 인상으로 충격을 주기보다는 미리 0.01%라도 올려 인플레와 버블 조짐에 경고 사인을 보낼 필요가 있다. 국제 공조 체제에 협조 잘한다고 노벨 경제학상이 수여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