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획일적인 '친일파' 기준… 역사 해석의 독점권을 가진 당신들은 누구냐?"

조선일보
  • 선임기자
    입력 2009.11.23 06:18

    '친일파를 위한 변론' 엄상익 변호사
    大盜 조세형 무료변론'이용호 게이트' 글 써 경찰 조사받기도
    親日 글 쓴 김동인은'천황모독죄'로 복역 어느쪽에 무게 둘건가
    작위와 은사금 받은 공인된 매국노들만 친일파로 한정해야

    "지도에 학교가 표시돼 있으면 그걸 '진리'로 알았어요. 현실에는 학교가 없는데. 지도에 표시된 고가(古家)가 현실에는 시영아파트야. 실제 지형은 안 보고 지도만 봐온 거죠. 그처럼 '역사는 이래야 된다'고 알았는데, 중앙국립도서관에서 일제시대 신문, 잡지, 기행문, 소설 등을 찾아 읽으면서, '내가 잘못 알아왔구나'를 깨달아요.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잣대가 뭔지, 당시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모르고…."

    엄상익(55) 변호사의 사무실에는 두꺼운 표지를 겉대고 끈으로 묶어 제본한 논문과 일제시대 잡지들이 쌓여있었다. 그는 '역사' 앞에 진지하게 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알아왔던 그는 약간 돈키호테 같은 인물이다. 8번만에 겨우 고시에 합격하고 수임 사건이 들어오지 않자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사건이라면 무료로 맡겠다. 내게 올 필요도 없고 내가 찾아가겠다"로 그는 법조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대도(大盜)' 조세형과 탈주범 신창원 등을 무료 변론했고, 재벌가의 여대생 살해사건,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명예훼손 피소, MBC PD수첩 고소 사건 등을 맡았다. 그런 스토리와 법정 풍경을 잡지에 연재하거나 단행본으로 내면서, 법원과 검찰 관계자를 때로는 분노케 했다. '이용호 게이트' 관련 글로 인해서는 이씨의 고소로 경찰의 철제 의자에 앉아 3시간 넘게 조사받기도 했다.

    지난 96년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재판' 당시에는 대법원 판사로 구성된 변호인단에 끼어들 경력이 안된다 싶어 그는 방청석으로 출근해 30차례의 재판을 방청한 뒤 단행본을 썼다. 그는 "당시 법원 화장실에서 한 재벌회장이 오줌을 누고 있는데 기라성 같았던 변호사 선배가 곁에서 '예 회장님, 예 회장님' 하며 굽실거리는 광경을 보니 '직위'라는 게 별 것 아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개인'으로 눈치 안 보고 살아온 인물이 소위 '친일파'를 위한 변호사가 됐다. '친일파'로 등재될 뻔 했던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그의 소송으로 친일인명사전에서 이름이 빠졌다. 아마 친일파 소송과 관련해 첫 기록일 것이다. 그 뒤로 삼양사 창업주인 김연수와 소설가 김동인의 '친일파' 소송을 맡고 있다.

    "신현확 전 총리는 친구(신철식 전 총리실 국무차장) 부친이었어요. 일제시대에 고시를 했고 군수관(軍需官)을 했다고 친일파라는 겁니다. 어떻게 이걸로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친일파로 낙인찍을 수 있지요? 이 사건을 맡으면서 일제 시대의 원(原)자료들을 찾아 읽고 당시 삶의 실상을 보면서 제 자신의 생각부터 많이 바뀌게 됐어요."

    엄상익 변호사는“역사는 이래야 된다고 알았는데, 일제시대 신문·잡지들을 찾아 읽으면서‘내가 잘못 알아왔구나’를 깨달았다”고 말했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우선 친일파 변론을 맡아 돈을 번다는 부담은 없나요?

    "지금 내가 꼭 할 일을 만난 거죠.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라는 말의 파괴력을 알지요. 어쩌면 억울한 약자들은 더 이상 자신을 변명할 수 없는 '친일파' 본인이나 그 후손일지 모릅니다."

    ―억울한 친일파라…, 너무 극단적으로 기울어져 있군요.

    "3ㆍ1 운동의 재판 자료를 읽어보면 당시 33인 민족대표 중에는 '합방이 되면 일본 시민과 똑같이 대우받고 살기가 좋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10년이 넘었는데도 차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독립을 주면 해낼 수 있겠느냐'는 일본 재판장의 물음에는 '갑자기 독립을 주면 혼자 일어설 수 없다. 단계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참정권을 다오'라고 답변합니다. 아, 민족지도자의 의식이 이런 거였구나 깨달았죠. 1930년대 들어서면 일본은 더욱 팽창하고 세계적인 강군(强軍)이 됩니다. 당시 잡지를 보면 '이에 대항해 구식 무기를 가진 무장투쟁이 타당성 있는가' 하는 좌절과 절망이 비칩니다. 시대 상황에서는 '친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순일(順日)'이었지요. 자식을 키우고 학교에 보내야 했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

    ―상황에 대한 이해를 너무 강조했을때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논리에 빠집니다. 역사의 '정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당대 현실이나 각 개인의 내면을 하나하나 보지 않고, 획일적 잣대에 맞추는 것은 결코 '정의'일 수가 없습니다. 정부 수립(1948년) 직후 '반민특위'에서도 '우리는 일제 시대를 살아봤으니까,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다 용서할 수도 있고 모두 다 친일파로 몰 수도 있다'며 그런 철학적 토의가 있었지요. 당시 판결문을 보면 선배들의 번민과 고뇌를 느낄 수 있어요. 그때는 당사자도 증인도 살아있고 자료도 더 많이 남아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일제 때 무슨 직급 이상 관료를 했으면 친일파,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동조한 글을 썼으면 친일파, 국방헌금 10만원 이상 했으면 친일파'라고 획일적인 기준에서 하고 있어요."

    ―복잡한 이해 관계가 걸린 작업일수록 일정한 기준은 필요한 게 아닌가요?

    "문제는 이 작업을 하는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에게 역사 해석의 독점권을 주는 게 옳으냐는 겁니다. 소송을 하면서 '당신들은 누구냐'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이냐'고 많이 따졌어요. 이들은 공정한 역사학자도 재판관도 아닙니다. 과거 '반민특위' 구성원들은 독립운동을 하거나 학병(學兵)에서 달아났던 강한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때는 이름도 다 공개됐습니다. 지금 위원회 조사관의 신분이나 성향, 경력에 대해 알 수가 없어요. 판정 결과에 대해서는 민ㆍ형사 소송을 못하게 특별법으로 막고 있어요.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과 인격권이 침해되는데도 말입니다. 엉터리 수사를 하면 형사도 고소당하고 처벌받지만 여기는 치외법권입니다. 그래서 정부를 상대로 한 행정소송을 하는 겁니다."

    ―얼마전 한 민간단체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대한민국 정통성을 둘러싼 논쟁도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다만 의문을 느끼는 게 있다면, 지금 위원회에서는 소설의 한 페이지만 보고 한 소설가를 모두 평가하겠다는 식이지요. 그렇게 기록 정리하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 특정 의도를 갖고 폄하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거죠. 앵글의 초점이 잘못된 기록이지요."

    ―인물 행적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전체를 모두 봐야 한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 태도도 중요하지 않은가요?

    "겉으로 드러난 한 인간의 태도만큼이나 그 내면도 살펴야 하지요. 1942년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던 시기에 김동인(金東仁)은 '천황모독죄'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천황 별거 아니다'고 한 거죠. 또 당시 일제를 위해 사람들을 독려하는 사회주의자인 여운형(�M運亨)을 보고 '친일파'라고 글을 써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요. 그런 김동인이 관보(官報)인 매일신보에는 '대동아공영권 괜찮다'는 식의 글을 썼어요. 한 작가의 상반된 두 행동을 두고 어떻게 무게를 잴 건가요?"

    ―당신의 기준으로 하면 도대체 '친일파'를 분류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 자료에는 친일을 해준 조선 인사들에게 작위와 은사금 등 대가를 줬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일본이 인정한 친일인사들이 있어요. 소위 나라를 팔아먹는 데 결탁한 매국노입니다. 또 일제 앞잡이로 조선사람을 괴롭히고, 우리를 해치면서까지 일제에 달라붙은 사람들이 그 대상입니다. 친일파는 이들로 한정해야 합니다. 시대적 상황과 각 인물의 전체적 삶을 봤을 때 함부로 '친일파'로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친일을 그 상황에서 먹고 살기 위한 행위로 용납한다면 그 누구도 재단을 할 수 없게 되겠군요?

    "1939년 사회주의자 인정식(印貞植)이 '삼천리' 잡지에 '오늘의 정치적 상황을 3ㆍ1운동 당시와 비교해본다면 천양과 같은 차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개개인이 전향한 것이 아니라 민족으로서의 조선인 전체가 일제에 전향한 것이다. 이제는 일본제국의 대륙침략정책에 끝까지 협동하는 충실한 국민으로서만 조선인이 존재하며…'라고 썼어요. 이러한 시대 상황, 인간 내면을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일제식민지 하의 친일행위에 대해 더 이상 선과 악, 정의라는 잣대로 판정하기 어렵다는 뜻인가요?

    "그건 추상적인 말씀이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요. 월북화가인 정현웅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생계를 위해 친일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로 등재가 됐습니다. 이렇게 낙인 찍는 것이 정의일까요? 일제는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는 그림을 그리게 했고, 글 쓰는 사람에게는 글을 쓰라고 했어요. 돈 있는 사람에게는 국방헌금을 강요했고, '헌금을 왜 안 내느냐'며 내용증명 우편까지 보냈지요. 이를 자진해서 한 사람도 있고 강요받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일제식민지라는 특수 상황에서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잘난 사람들의 그런 행적이 모두 친일이라면, 돈과 재능이 없는 사람이 노동력을 내서 비행장 터를 닦은 것도 친일이고, 일제의 산미증산정책에 따라 열심히 농사지은 것도 친일이 되겠지요."

    ―생계형 협력자는 뚜렷한 친일 행적이 없으면 제외하고, 권력과 부, 명예를 좇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한다는 기준은 있지 않습니까?

    "이광수나 최남선은 '조선 젊은이여 학병에 나가라'는 글을 썼지요. 우리 청년들이 병역을 마쳐야 동등한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얻자는 쪽이었지요. 당시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25세면 인생 끝'이라는 노래가 유행했어요. '자신들이 전쟁터에서 다 죽고 나면 일본 땅에 조선인들이 모두 들어와 살 것'이라는 말도 떠돌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루 빨리 일본에 협조해 일본의 시민이 되는 게 살 길이라고 이광수나 최남선은 봤던 것이지요. 이 때문에 친일파의 대명사가 됐지만, 나름대로 우리 민족의 살 길에 대한 고뇌가 있었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인도의 간디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나가야 한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상황 논리에서 이들을 받아들인다면,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을 한 사람들, 혹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기 위해 숨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어떤 말을 할 겁니까?

    "이는 다른 논의가 됩니다.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어쩌면 체제 안에서 모색하고 사는 것이 더 힘들었을지 모릅니다. 위원회에서 거론하는 '친일파'들은 당대의 각 분야에서 가장 앞선 지도급 인물들이 총망라됐습니다. 소위 사회의 상부구조를 이루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책임을 지어 '친일파'로 부각시킨 거죠. 그 시절에 살았던 대부분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인물들을 부각시켜 '희생양'처럼 만드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책임이 있다면 그 시절 살았던 모두의 책임이 되겠지요."

    ―모두가 책임이 있다면 아무도 책임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꼭 그런 건 아니고, 친일파 아닌 인물을 친일파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죠. 과연 그 시대에 살았다는 게 원죄(原罪)가 될까요? 그 시대에 살지 않았던 우리들이 마음대로 판정할 만큼…."

    이제부터 그가 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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