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논설실장

'리오리엔트(Reorient)'를 굳이 번역하자면 '동양의 부활'쯤 될 것이다. 진보 성향의 프랑크(Andre G Frank) 교수가 11년 전 출판, 미국·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인류 문명사에서 중국인도가 다시 주도권을 잡으리라 예언하고 서양 중심적인 역사관에 경고를 보낸 내용이다.

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이산출판)은 5년 후에야 나왔고, 고려와 조선의 역사는 물론 오늘의 한국을 언급한 대목이 적었던 탓인지 별 인기를 끌지 못했다.

서양이 동양을 재평가하는 점수와 한국이 동양을 평가하는 점수 사이에는 그만큼 격차가 난다. 그들의 높은 점수 매김이 때로는 우리를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경제역사학자 매디슨(Angus Maddison) 교수는 국가 경제력(GDP), 1인당 소득, 인구 등 통계로 인류 경제사를 연구해왔다. 그는 작년 3월 중국이 미국의 경제력을 앞설 시기를 2015년으로 앞당겼다. 세계 경제의 왕위(王位) 교체 시기를 2030년쯤이라고 주장해오던 것을 수정했다.

매디슨은 20년 후에는 중국이 세계 경제의 25%를 점유, 지금 미국이 누리고 있는 지배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다면 청나라가 잃어버린 패권을 2세기 만에 되찾게 될 것인가.

한국에서는 매디슨도 인기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가 2000년 인류 경제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한국은 거의 무시했다. 일본에 관해서는 수백년 전의 인구와 1인당 소득까지 세밀하게 분석했지만, 한국은 기타 아시아 국가들이라는 들러리 그룹에 뒤섞어 넣었다.

프랑크나 매디슨을 통해 중국의 부상(浮上) 속도, 아시아의 성장 파워를 새삼 강조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는 세계 경제사 속의 신라-고려-조선의 위치, 동양 경제권 안의 한국을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몇 십년 후 세계 2위가 될 것이라는 어느 투자은행의 보고서에 우쭐하거나, 흘러넘치는 달러를 들여와 일부러 한국의 미래를 치켜세우는 대박 투자자들의 입에 발린 칭송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 역사에는 다른 나라까지 잘살게 만들어준 경제 철학이나 사상이 없었다. 수출로 국부(國富)를 나라 밖에서 끌어올 제조업 기술도 없었으며, 이웃 나라를 살찌게 해줄 수억 인구나 소비 시장도 없었다. 프랑크나 매디슨이 무시해도 할 말이 궁한 나라다.

그런 루저(loser) 국가가 지난 60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배웠고, 그들의 돈과 첨단 기술의 혜택을 받았다. 이웃 일본에서는 제조업을 벼락치기로 학습했고, 중국에서는 큰 시장과 값싼 노동력을 선물로 받았다.

앞으로 20년, 30년을 더 가도 3명의 스승을 동시에 받들어야 하는 처지가 쉽게 변할 것 같지 않다. 힘을 잃지 않은 달러제국의 틀 안에서 두 경제 강국을 이웃에 모셔야 하는 국가의 좌표축은 이번 금융위기 이후 더 조여드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거포(巨砲)들 사이에 파묻혀 스스로 비하하거나 3각형 틀 안에 갇힌 토끼처럼 옹색한 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다. '한국은 앞으로 뭘 먹고 사느냐'고 장탄식하는 분들이 많지만, 오히려 세 강대국을 더 배우고 활용하는 성장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하이테크 기술을 더 배워야 한다. 항공우주산업, 그린에너지 분야에서 더 배워야 한다. 자동차 조선 철강 같은 구식 제조업에서도 우리가 따라잡지 못한 일본 기술은 여전히 많다.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때마침 첨단 기술을 가진 일본 회사가 매물로 나오고, 중국은 이를 하나 둘 인수하고 있다. 한국 제조업이 무너진다고 야단이지만, 생존 기간을 10년 이상 연장시켜 줄 기술은 일본에 있다.

중국 시장도 더 확장해야 한다. 4만여 기업이 진출했으나 중국보다 먼저 산업혁명의 길을 걸었던 선행 주자로서 중국에서 돈벌이할 만한 사업은 얼마든지 있다. 그들의 소득 수준, 교육열, 투자 열기를 감안하면 서울에서 성공한 입시학원 모델이나 전문 병원, 헬스 사업 같은 서비스 업종에서 성공 가능성은 열려 있다.

미국에서는 금융을 더 배워야 한다. 지난 200년 동안 유럽과 미국은 산업혁명으로 세계를 지배했고, 최근 30여년은 금융 혁명으로 전 세계를 흔들었다. 그들의 산업혁명을 뒤따라가며 엄청난 흑자를 냈던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형 금융 혁명의 와중에서는 피해자로 전락하거나 끌려가는 방어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인류 사회에 화폐가 존재하는 한 금융이야말로 필수 산업이다. 미국의 금융혁명이 큰 부작용을 낳고 있기는 해도 달러를 밀어내고 왕좌를 이어받을 화폐는 아직 없다. 동양권 화폐 중 유로나 파운드보다 신뢰가 높은 통화도 없다. 우리가 아시아 통화 통합에 앞장서고, 금융 혁명을 먼저 일으킨다면 다른 아시아 국가를 앞서갈 수 있을 것이다.

경제에 관한 한 우리는 스승을 잘 만났고 이웃을 잘 뒀다. 인류 경제 역사에 보탠 것이 없다고 무시당하는 나라가 먹고살 길은 가까운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