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유신과 연인사이?… 선덕여왕의 세가지 미스터리

조선일보
  • 유석재 기자
    입력 2009.11.21 02:53 | 수정 2009.11.21 09:42

    1 성공한 군주였나 - 재위 15년동안 패전 거듭 상대등 반란 등 내치도 불안
    2 남편 있었나 - 삼국유사엔 음갈문왕 기록 김유신과의 로맨스는 허구
    3 피살? 자연사? - 삼국사기엔 死因 언급없어 일부 학자는 “비담이 시해”

    대구 부인사 숭모전에 있는 선덕여왕의 영정. 1990년대 경북대 교수였던 유황 화백이 그린 작품이다. / 조선일보 DB
    국민의 95.6%가 MBC TV 월화극 '선덕여왕(善德女王)'을 한 번이라도 시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닷컴 11월 16일 보도

    "분통이 터져서 볼 수가 없다!" 많은 신라사 연구자들은 드라마 '선덕여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사극이라도 허구가 도를 넘었다는 얘기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적 인물로 보기 힘든 미실(美室)이다. 미실은 학계에서 진짜 역사서로 공인받지 못한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만 나오는 인물인데 실존인물인 것처럼 그려졌다. 한 술 더 떠서 '화랑세기'에도 없는 미실의 쿠데타가 사실인 것처럼 버젓이 묘사된다.

    드라마 내용과 섞여서 인터넷에 유포되는 선덕여왕 관련 글들은 7세기 신라사 전체가 뒤죽박죽 된 듯한 느낌을 준다. 과연 어디까지가 '역사'에 기록된 사실일까? 세 가지 미스터리를 중심으로 추적해 본다.

    덕만에게 남편이 있었나?

    드라마에서 공주 덕만(德曼·선덕여왕)은 혼인을 거부하고 왕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의 남편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연표에 해당하는 왕력(王曆)편에 수수께끼와도 같은 기록이 한 줄 등장한다.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었다." 오직 여기서만 언급된 이 내용을 토대로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원래 '갈문왕'은 왕과 왕비의 아버지·동생 등 중요 왕족에게 주는 칭호다. 여기에서 '여왕의 남편'도 포함한다는 설이 생겼다.

    '음갈문왕'은 누구였을까? '음'이 인명이라면 글자가 비슷한 반(飯)이란 이름을 잘못 썼을 가능성이 있는데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이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갈문왕이었다.

    이 때문에 이 두 사람 중 한 명이 선덕여왕의 남편이라는 설이 떠올랐으나 확증은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는 정반대 기록이 나온다. 당 태종이 향기 없는 모란꽃의 그림을 보내자 여왕은 "내가 짝(��)이 없음을 놀린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음갈문왕'이 일찍 죽었거나 사실혼 관계에 그쳤다는 해석이 있다. 선덕여왕이 용수·용춘·흠반·을제 등 3~4명의 남편을 거느렸다는 이야기는 위서(僞書) 의심을 받고 있는 '화랑세기'에만 등장한다.

    결국 현재로선 선덕여왕에게 '누구인지 불확실한 비공식 남편 한 명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물론 여왕이 즉위 전 김유신과 연인 관계였다는 드라마의 설정은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선덕여왕(이요원 분) 김유신(엄태웅 분) 비담(김남길 분)
    선덕여왕이 실패한 군주였다고?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을 세운 업적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왕으로 알려졌으며 드라마도 그렇게 긍정적인 톤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 학자들은 "정치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없는 군주"라고 본다. 서기 632년부터 647년까지의 선덕여왕 재위기간 15년은 신라가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했던 시기였다. 즉위 초인 636년에도 수도 금성(金城·경북 경주)에서 불과 10㎞ 떨어진 여근곡(女根谷)까지 백제군이 침투해 올 정도였다.

    642년 서부 최대의 요새였던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이 백제의 공격으로 함락당했다. 망국(亡國)의 위기가 코앞에 닥쳤다. 큰 돌이 저절로 옮겨가고 동해바다가 붉어지는 등의 기록이 민심이 대단히 불안했음을 말해 준다.

    분황사와 황룡사 9층탑 등 예산이 많이 드는 토목공사는 단기적으로 도움이 되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고구려와의 제휴가 실패한 뒤 당과 접촉했지만 당 태종은 643년 "여인이 임금을 할 바에는 내 친족을 신라왕으로 보내겠다"는 '여왕 폐위론'을 제시했다. 여왕의 권위는 실추됐다. 이미 여왕 즉위 직전 이찬 칠숙(柒宿)이 모반하는 등 귀족들은 동요의 기미를 보였다. 647년 최고 관직인 상대등 자리에 있던 비담(毗曇)이 염종(廉宗)과 군사를 일으켰다. 조선시대로 치면 영의정이 반란을 일으킨 셈이다.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비담의 반란은 선덕여왕의 재위기간이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음을 의미한다"며 "반란을 진압하고 나당연합을 추진한 세력은 김춘추·김유신이지 여왕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사인(死因)은…피살? 자연사? 쇼크사?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비담의 반란이 실패로 끝났다는 내용 뒤에 선덕여왕의 죽음을 기록했다. 여왕의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기록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의문이 생긴다.

    비담의 반란은 647년 1월에 일어났다고 적혀 있는데 여왕이 죽은 것은 1월 8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김유신열전은 비담과 김유신의 군대가 10일 넘게 공방전을 벌였다고 기록했다. 신라본기는 비담을 참한 것이 1월 17일이라고 했는데 이미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한 뒤였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은 비담의 난이 아직 진행되던 와중에 죽은 것이 된다. 이 때문에 여왕이 비담의 반군에 의해 시해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평소 '왕이 편치 못해 의약과 기도도 효험이 없었다' '자기가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는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병사했을 것이며, 비담이 이를 예상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천년의 왕국 신라'를 쓴 김기흥 건국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성골(聖骨)로서 거룩한 존재임을 의심해보지 않았을 여왕으로서는, 막상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신하들의 반란을 대하자 충격을 받아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연구자들은 반란을 일으킨 주체가 비담이 아니라 오히려 선덕여왕과 김유신 측이었다고 본다. 비담이 주도하는 화백회의에서 여왕의 퇴위를 요구하거나 결정했고 여기에 김유신 등이 반발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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