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귀환 납북자들의 수난

조선일보
  • 김홍진 논설위원
  • 김도원
    입력 2009.11.17 23:07 | 수정 2009.11.18 10:40

    1971년 납북됐던 김성학씨는 1985년 경기도경 대공분실에 체포돼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조사받았다. 발가락 사이에 전기막대를 끼우고 6번이나 강한 전기를 흘렸다. 그 충격으로 가슴을 결박했던 벨트가 끊기고 허리가 뒤로 꺾였다. 수사관들이 후유증을 막는다며 진한 소금물을 먹였지만 척추는 망가졌다. 1980년 진도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던 석달윤씨는 전기고문, 물고문 말고도 요도(尿道)에 볼펜을 찔러넣는 고문도 당했다고 증언했다.

    ▶1965년 북한 경비선이 어민 100여명을 납북했던 인천 강화군 미법도를 1970년대 말 이근안이 찾았다. 그는 주민 정영씨를 데려가 산속 소나무 밑에서 병 하나를 캐내고 본 대로 증언하게 했다. 다른 주민 안장영씨가 간첩으로 몰렸다. 정씨도 1983년 체포됐고 아내까지 고문당하자 간첩죄를 인정했다. 수사관들은 조서에 "공작금으로 1000원짜리 한 다발을 받았다"고 썼다가 나중엔 "당시엔 500원짜리 지폐밖에 없었다"고 바꿨다.

    ▶1967년 납북 어부 서창덕씨도 1984년 간첩죄로 잡혀 쇠막대기에 손과 발이 매달린 채 각목으로 맞은 끝에 거짓 자백했다. 서씨는 "국민학교도 못 나와 이름 석자 겨우 그리기 때문에 그들이 써온 서류에 지장만 찍었다"고 했다. 그는 작년 10월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지난 9월 10억원 국가 배상 판결도 받았다. 그는 "간첩 아버지를 둔 적 없다며 나를 등졌던 아들과 재회하고 싶다"고 했다.

    ▶간첩 누명을 쓰지 않더라도 귀환 납북자들은 툭하면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이웃으로부터도 '간첩'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많은 납북 어부들이 보안법과 수산업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김성학씨는 "납북 어민들이 돌아온 것을 후회할 만큼 국가가 인권을 짓밟았다"고 했다. 1969년 납북됐던 어민 장득필씨는 "나만 당하면 괜찮을 것을, 자식들까지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취업도 못하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고 했다.

    ▶전후(戰後) 납북자 3821명 중 3318명이 귀환했고 그중 3271명이 선원이었다. 2007년 납북 피해자 보상·지원법이 만들어졌지만 3년 넘게 납북 억류된 피해자만 정착금과 위로금을 받게 돼 있어 단 8명만 보상을 받았다. 국민권익위원회가 9월 "3년 미만도 제대로 보상하라"고 개선을 권고했다고 한다. 겪은 고초만큼 보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잘못된 인식을 버리고 이들도 시대의 피해자라고 인정하는 명예 회복부터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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